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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부부 Oct 07. 2021

아니, 내가 XX라니!

남편, Y 이야기 - 정자검사


    이 글은 나의 난밍아웃의 그 시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 부부는 내가 서른, 아내가 스물아홉일 때 결혼을 했다. 친구들 열 명 중 한 명 정도 결혼을 했던가. 요즘치곤 상당히 이른 나이에 심지어 두 살 터울인 형보다 먼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결혼할 당시 아내는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덜컥 임신하게 되면 업무에 지장이 줄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우리는 1년 뒤쯤 아이를 가지자고 합의하였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 집에서 나는 태평한 쪽이고 아내는 미리 불안해하는 타입이라 임신 전부터 준비된 상태로 임신을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아내의 주도하에 우리는 지역 보건소에서 산전검사를 받기로 했다. 보건소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건강검진이다 보니 혈액검사, 소변검사 등 일반적인 검사이긴 했지만, 결과는 우리 모두 정상 소견을 받았다.      

    간염 등 항체가 없는 질병에 대해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방접종까지 받았고 보건소에서 주는 엽산도 받아와서 꼬박꼬박 잘 챙겨 먹었다. 이때 까지만 해도 우리 부부는 착실히 임신 준비도 잘하고 있으니 합의했던 그 날이 되어 피임 없이 부부관계만 가지면 아기 천사가 우리를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슬슬 아이를 가지기 위해 배란일 전후로 관계를 가지기 시작했건만 결과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한 줄.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대학 시절 사고 쳐서 결혼한 친구를 보면서 피임을 하지 않으면 바로 아이를 가지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배란기에 임신 시도를 해도 통계적으로 임신확률은 약 2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글을 보고는 상심해 하는 아내를 위로했다.  

    

“원래 한 번에 되는 게 운이 좋은 거래!
우리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한 세 달만 두고 보자.”



    그러나 희망을 품었던 그 세 달도 어느새 지나갔다. 이제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고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산전 정밀검사를 받기로 했다. 정액을 어떻게 채취하는지 전혀 몰랐던 나는 인터넷에서 정액 채취 방법을 찾아보고는 기겁했다. 일반적인 정액 채취 방법은 자위 후에 검체 용기에 정액을 담아 제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불안해하는 아내를 위해 먼저 정밀검사를 받자고 말한 건 나였지만 지금이라도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고민 끝에 그날은 왔고 정액검사를 하기 위해 착잡한 마음으로 산부인과에 도착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의 표정은 ‘오늘 끝장을 보자’는 듯 자못 결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서로 다른 검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아내와 나는 다른 곳으로 안내받았다. 지금이라도 하지 말자고 할까. 마지막으로 망설이며 아내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결국 ‘화이팅’이라는 말만 서로 주고받고 우리 부부는 다른 층으로 헤어졌다.

   

    대기표를 끊고 순번이 되자 간호사는 검체 용기와 나의 신상정보를 확인한 후 나를 병원의 구석진 공간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작은 방 3개가 모여 있었다. 정액을 채취한 검체 용기를 두는 곳의 위치와 내가 들어갈 공간을 안내받고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큰 TV와 헤드셋, 검은색 안락의자와 세면대가 있었다. 일단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나서 안락의자에 앉고 나니 멘붕이 왔다. 물론 나는 건강하고 평범한 성인 남성이고, 야동을 보며 자위를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다만 이건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한 영역의 일인데 밖에서 사람들이 득실대는 곳에서는 차마 그 짓을 한다는 게 여간 께름칙한 게 아니었고 하필 영상도 취향(?)에 맞지 않아 더욱 힘들었다. 결국 검사는 무사히 마쳤고 분석 결과를 받기 위해 약 2주간 기다렸다.

    



    결과는 대부분 정상범주에 들었지만, 정자가 운동성이 정상보다 낮다는 판정을 받았다.


‘두둥.. 내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처음에는 현실을 부정했다. 의사가 상담 결과를 계속 설명하고 있는 동안 내 머릿속엔 현실부정의 다양한 근거가 떠올랐다.     

사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유명한 그짤. 내가 XX라니!!!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근거 1. 나는 어릴 적부터 별 탈 없이 건강했다. 어릴 적 엄마 손에 끌려가서 받게 되는 그 수술을 제외하고는 수술도 받아본 적도 크게 아파본 적도 없었다. 그런 내가 왜?


근거 2. 나는 아직 젊다. 할리우드 뉴스를 보면 70대 할아버지도 아들을 낳는다는데 내가 왜?


근거 3. 그 전날 나는 몹시 피곤했다. 극도의 피곤함이 영향을 미친 게 분명하다.


근거 4. 검사를 위해 금욕하는 게 좋은 줄 알고 금욕을 오래 했더니 사회적 거리 두기를 못해 이 친구들이 운동을 제대로 못 한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아무리 아닐 거라 부정해봐도 소용없는 짓이고 받아들여야 할 것은 받아들여야 했다. 정자의 운동성이 정상범주 밑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지금까지 임신이 안 된 게 내 문제였다는 생각에 아내한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나저나 정자의 운동성을 높이기 위해서 앞으로 나는 술, 담배 하지 말고, 고환 주변을 시원하게 하고, 스트레스도 최대한 받지 말아야 한다는데, 과연 이게 회사 생활을 하면서 가능하기나 한 일인지 모르겠다. 예상치 못한 결과지를 받아들고 어떻게 이놈의 수치를 좋게 만들까 고민하며 그날 밤은 잠을 설쳤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원치 않은 난임과 우리 부부의 동거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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