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자신이 제시한 방법을 보드판에 그림을 그려가며 확인하던 영성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수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뭔가를 발견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엿보인다. 영성이의 열정 에너지는 생각을 넘어서지 못했을까. 에너지가 불안함이 되어 주변으로 퍼지고 있을 때 윤이가 눈을 반짝였다.
수애는 왜 드디어 윤이가 맘을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수애는 윤이가 처음부터 이 모든 상황을 알고 관조적으로 지켜보는 듯 느껴졌다.]
윤이는 동아리 멤버 중 수애가 가장 오래전부터 최근까지 소통하며 알고 지내 온 친구였다. 윤이는 수애가 수학 공부를 가르치기도 했다. 둘 사이 관계를 살펴볼 때, 윤이가 수애에게 기대어 왔는지 정작수애 자신이 윤이에게 의지했는지는모를 일이었다. 윤이는 생각이 많고 깊은 아이였다. 상처가 많은 18세 고2 학생이었기에 또 다른 두려움을 미리 방어하려 했는지 그녀는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수애가 윤이와 처음 만났을 때, 윤이는 지금보다 더 경계심이 많았고 몸은 항상 긴장하고 경직되어 있었다. 그런 윤이에게 좀 더 마음이 쓰였다. 자신과 많이 닮은 그녀의 모습에서 자기도 모르게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세상을 경계하고 타자에게 다가가거나 마음을 주지 않았음을.... 외로움에 익숙해진 시간을 보내려고 수학공부를 적극적으로 하게 된 동기가 천천히 떠올랐다. 윤이를 만나며 감춰뒀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부모님의 부제가 윤이를 강하게 만든 듯 보이지만 사실 윤이를 키운 할머니의 사랑 덕분에 윤이는 꼿꼿하고 강할 수 있었다. 수애는 그렇게 안도하며 할머님께 늘 감사하고 있었다.
지금 윤이가 초롱거리는 눈으로 추파를 던지며 미소를 보낸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다시 열리지 않는 입을 뗀다. 앞으로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천천히 정리하듯 말했다. 오늘 토론의 중심에 있는 내심과 외심의 개념을 다시 정리해 보길 제안했다. 자신이 실생활 문제를 내 보겠다고 그래도 되는지 동의를 구하려는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정중한 제안이었다. 함께 나누겠다는 마음이 더 컸기에 떨리고 불편한 마음을 구석으로 내몰고 친구들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내심과 외심이 실생활에 활용되는 몇 가지 문제를 요약해서 친구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문제를 내보려고 했다. 물론 함께 풀어보자는 제안도 잊지 않았다. 친구들을 바라보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윤이는자신의 성향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말했다. 문제를 설명하던 윤이가 미소 짓는다.
싱그러운 봄 끝자락에 있다 보니 더운 날이 잦아지네요. 한 낮, 태양과 마주하며 아파트 곳곳, 공공장소나 주변으로 분수가 시원하게 물을 뿜어내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동네 공원 근처에 아주 작게 분수대신 물이 흐르고 있지요. 그곳에서 흐르는 물은 뭔가 시원하기보다는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태양빛이 강한 요즘 가능하다면 제가 그려온 시원한 벤치를 만들고 싶습니다.
첫째, 삼각형 모양의 화단 밖 벤치에 물이 튀지 않아야 합니다. 둘째, 최대한 많은 꽃에 골고루 물을 주는 위치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려고 합니다. 분수의 물이 벤치에 닿거나 튀지 않아야 합니다. 분수까지 가장 가깝게 삼각형 모양으로 벤치를 만들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천천히 생각해 보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어서 조용히 앉아 있던 현중이가 크지 않은 목소리로 의사를 표시했다. 오늘 토론 내내 입을 다물고 있어서인지 목이 메인 소리를 다듬고 겨우 목과 컨디션을 정리해서 친구들에게 제안했다. 평소 생각하고 있었는지 실생활 문제라며 신이 나서 그 자리에서 바로 문제 하나를 읊었다.
새로 이사한 지역에 아직 버스 정류장이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조건이 있습니다. 신축 아파트 각 단지 대표 동인 A, B, C 동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곳에 버스 정류장을 세우겠다는 공문이 있습니다. 어떤 조건이나 경우를 이용해야 세 동이 있는 곳에서 같은 거리에 버스 정류장을 세울 수 있을까요?
현중이의 문제를 끝으로 친구들은 웅성거린다. 어떤 친구는 고개를 갸웃하나 몇몇 친구들은 벌써 생각을 정리한 것처럼 보였다. 수애는 아이들의 동향을 살피며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보며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이미 도서관 대관 시간을 훨씬 지나고 있었다. 마무리 인사를 하며 친구들과 오늘 토론에서 있었던 나눔에 대해 다음 시간까지 기록으로 남길 것을 제안했다. 물론 마지막에 윤이와 현중이가 낸 문제에 대해 자기의 생각으로 친구들과 적극적인 나눔을 하기를 바란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친구들은 각자의 분위기, 모습만큼 인사를 하고 각자 바쁘게 천천히 요란스럽게 쭈뼛거리며 도서관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텅 빈 강의실에서 수애는 괜히 기분이 더 좋아진다. 뭔지 모를 뿌듯함. 오늘 처음 만난 현중이와 몇몇 친구들에 대해 수애는 좀 더 천천히 알아가고자 한다. 사회나 가정에서 이 친구들이 소외됨을 느꼈다면 수학 토론, 토론에 퐁당 빠질 이곳에서 만큼은 위안을 받고 감정을 표출하고 자신을 좀 더 크고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으로 좀 전 토론 시간을 떠올렸다.
수애의 얼굴 가득 퍼진 미소를 보면 토론 동아리에 대한 그녀의 애정을 살필 수 있다. 이미 멤버들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의 생각과 창의력의 깊이와 넓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