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시간... 이 순간 마취도 없이 배를 개복한 후 전체 장기를 천천히 들여다보고 임시방편으로 봉합을 한다. 그리고 이젠 두상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시선이 움직인다.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지만 좀 전과 같은 방법으로 뇌를 개복하고 이젠 시간으로 누적된 듯 보이는 켜켜이 쌓여 있는 불순물과 이물질이 자리한 벽을 심각하게 들여다본다. 그리고 다시 조심스럽게 봉합을 해 나간다.
자신을 좀 더 정확하게 보려는 노력일까? 육체와 영혼을모두 열어 두고 꼼꼼하게 스스로를 확인하려는 노력을 한다.
나는 깨어있다. 머리의 맑기는 전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보낸 지난 시간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맑다. 새벽시간 현재를 누리는 깊이는 예전에 비하면 훨씬 깊은 곳에 도달해있다. 잠시 눈을 감고 묵상이든 명상이든 오늘 더 맞는 것을 선택해서 하기로 한다.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상황이나 현상, 일어나는 일의 경중에는 나의 의지나 이성과는 무관하게 처음부터 서열이나 우선순위가 결정되어 있었던 걸까?
삶은 불현듯 속도가 더해지거나 더디게 가기도 하고 갑자기 운동 방향을 틀어서 나의 일관성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길을 걷다가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 자리 잡고 있는 무성한 나무들 사이를 정신없이 바쁘게 오가는 새들을 포착하곤 한다. 삶은 걸음을 재촉하며 걷고 있는 내 앞에 자신들의 목표를 열심히 쫓고 있는 새들이 지나가며 가볍게 배설하는 배설물이, 뚝하고 떨어지는 일들을 겪어 나가는 일상의 연속된 파노라마와 같다. 새들의 배설물 중 일부는 내가 목표로 겨냥되기도 했고 나와 함께 그 길을 걷는 동행인이 목표물이 되어 그 앞에 집중적으로 떨어지기도했다.
삶의 여러 가지 일은 얘기 치도 않게 벌어지기도 하며 예견되지 않았기에 호기롭게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앞으로 나아감 역시 자기 원형이나 현실과 적당하게 타협한 성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걸음의 보폭, 빠르기, 걸음걸이, 무게감... 등이 제각각 다른 나아감의 방향과 삶의 빠르기나 변화율을 말해준다. 우리는 각자 자신에 대해 잘 관찰하고 들여다보면 지금까지의 삶의 평균 기울기를 확인할 수 있고 숨어있는 곳곳의 순간 기울기가 보이기도 한다.
그 속에서는 나의 삶의 태도와는 다르게 자기 원형이나 삶과 적당히 타협한 성향이 더 도드라지게 일상 속에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삶의 대한 나의 태도, 범위를 더 확장시켜 본다면 우리들의 모습과 대비된 가장 적절한 비유가 무엇일까 여러 번 생각해보았지만 '불구경'이란 단어 이상으로 삶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함축하고 있는 건 드문 거 같다.불과 구경이 만난 이 합성어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새로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불구경'을 얘기하기 전에 '불'은 몸소 체험하고 직접적으로 겪어내는 것, 그리고 앞서 얘기한 구경으로 나눠볼 수 있다. 내가 겪어 낸 삶의 태도는 어떤 것이었을까? 모든 것이 불구경은 아니었겠지만 삶의 긴 시간 동안 불구경이 왜 없었겠는가?
혹자들은 불구경이 재밌다고 하지만 나에게 불구경은 일할의 재미나 호기로움도 없었다. 불구경으로 방향이 흘러간 것들은 삶의 의지나 호기로움을 앞선 두려움이 용기까지도 한 발짝 앞서 나가고 있었기에 나에게는 두려움만으로 가득 찬 불구경이었다. 그렇다면 몸소 체험할 수밖에 없었던 불구덩이에 있을 때도 불구덩이가 된 현장이나 그 속에 있는 사람을 구하고 그곳을 복원하기 위해 움직일 때도 내 마음은 얼마만큼 고스란히 그것을 느끼며 그 속에 온전히 빠져 있었을까?
그때마다 드러나는 내 호기로움은 타고난 것일까? 호기심 또한 환경에 끊임없이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호기로움이 남아있다는 건 자기 원형이라는 원래의 내가 좀 더 세력이 컸을 거라고예측해 본다. 구경을 하든 직접적으로 겪고 있든 깊은 곳에서는 자신을 숨기고 있지만 온전히 내 영혼이 자리를 잡고 있는 자기 원형이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때론 삶에 굳건히 청탁이나 타협으로 자기 원형보다는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는 자아가 더 강하게 세력을 키워서 그것에 끌려가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에너지가 고갈되고 다시 충전이 필요한 시기가 되면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자기 원형은 자연적으로 도드라져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나에게는 호기로움이 내면에 강하게 남아 있는데 그건 아직 세력을 잃지 않고 가끔 드러나는 자기 원형의 일부로 남아있다. 때로는 순간 그게 왜 궁금하지라고 내 안의 아이에게 묻곤 한다. 불구덩이 안에서 괴로워하며 탈출구, 비상구를 급히 찾고 비상상황을 서둘러 정리하고 해결해야 하는 순간에도 그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고민에 빠진다. 사유가 더 깊어졌다며 스스로 포장하기도 한다. 불구덩이에 어떤 경로로 들어갔으며 들어갈 당시의 기울기는 반드시 음수의 개념이었는지. 그때의 음의 기울기는 순간적으로 어떤 일과 만나면서 바로 생겼을까 아니면 삶의 긴 여정을 돌아보며 서서히 움직임을 하고 평균적으로 만들어진 평균 기울기일까?
만약에 평균적으로 만들어진 평균 기울기라면 불구덩이 속의 나는 최악의 순간 기울기를 겪고 있는 셈이다. 어떤 순간의 x값을 대입해서 나온 순간 기울기라면 그것이 비록 음의 기울기로 뛰어든 불구덩이 속이라도 회생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 희망이 일할이라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불구덩이에 있는 상황이나 사람을 구하고 복원하려는 노력 속에서도 도덕적 실천과 이성의 적극성은 공존하지 않았다. 우리는 탁상공론이나 계획된 이론적 실천보다는 실의를 논하고자 하나 이론에 앞서있는 혹자들은 경멸로 시선처리를 하고 불편한 상황을 가볍게 넘기고자 애를 쓰는 거 같다. 그들과 함께 그 시선처리를 고민하고 있었던 나 역시도 항상 실천에 있어 이성은 따로 움직이고 끊임없이 이성의 미로를 우왕좌왕하며 불구덩이에서의 탈출을 꿈꾸고 있었다. 방탈출의 비밀처럼 삶에도 법칙이나 수학의 공식이 적용된다면 삶은 조금은 간단명료해 질거라 조심스럽게 말한다.
하지만 수학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 과학이나 우리의 이성을 수식으로 옮겨주는 것뿐이기에 수학이 곧 자연이며 자연법칙이라 할 수 있다. 자연법칙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은 어디까지가 그 제한 범위일까? 자연법칙 안에서 삶을 바라본다는 건 단지 관조적 입장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법칙이란 실수 범위에서 보자면 여러 가지 다항함수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 제한 범위가 수직선 상의 전 범위, 실수 전체가 되는 것이다. 다양한 다항함수들의 기울기를 통하여 전한 수학의 언어는 직선과 곡선의 어우러짐이 곧 우리 삶이며 자연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들이 우리 삶에 얼마나 조화롭게 침범해서 누리고 있는지.
복소수까지 범위를 확장시켜 본다면 우리의 삶은 우주로 확장되며 우주의 보이지 않는 점선의 좌표축을 그려놓고 복소수를 대응시킬 수 있다. 아마도 자연법칙을 거스른다는 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허수의 등장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문명의 발달이나 인류의 지금의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더라도 허수를 우리의 삶에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할까? 허수가 우리 삶에 개입되지 않았어야 우리의 우주가 좀 더 긴 시간 밝은빛을 간직할 수 있었을까? 또한 우주는 고유성을 잘 유지하여 은하의 공간에서 더오랫동안 빛을 낼 수 있었을까?
삶은 불구경과도 같다. 앞서 언급한 대로 불구경을 할 때 난 한 번도 즐겁지 않았고 때론 용기보다 한 발짝 앞선 두려움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에 불구경은 나에게 그저 불편한 맘과 동선으로 나타내어지는 태도일 뿐이었다. 반면에 불구덩이에 있는 나는 상황 속에 존재하든 그것을 지켜내든 소극적 모습 안에 녹아있는 적극적 이성이 내가 그곳에 얼마나 크고 깊숙이 들어가 있는지 상기시켜 준다. 그때마다 드러나는 내 호기로움 또한 좀 더 적극적인 삶 속에서 그것들을 겪게 했다.
우리의 삶에서는 끊임없이 환경이 나를 지배하며 원초적으로 지니고 있던 고유성까지 잃어버리고 삶과 타협해서 그것을 '길들이기'라고 포장해서 말하곤 한다. 결국 극한 상황이나 특수한 환경과 만남을 한 이후 자기 원형은 고유성으로 잘 드러나며 나의 호기로움은 빛을 발산한다.
삶은 누구나에게 공평하고 평등하게 주어지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나 제대로 주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작가들이 끊임없이 작품을 내놓는 것 역시 시간 안에 잘했어요라는 스티커를 연신 붙여대는 거처럼 다작에 대한 잘못된 경쟁심이나 서로를 자극하는 상황과 같이 타자가 내 삶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우리의 생은 마침내 내가 온전히 살아내야 하고 나를 그대로 느끼고 표현해야 하는 것이지 타자가 나를 대신해 내 안에 스며들어 그대로 나를 녹여내고 표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오늘도 난 불구경보다는 직접 겪고 좀 더 적극적으로 자유로운 사유를 하고자 한다. 생에서 평균적으로 드러나는 아주 긴 기울기의 그래프에 접하고 있거나 완전히 포함된 곳곳에서의 순간 기울기로 좀 더 적극적으로 지금까지의 삶을 바라보며 내 앞의 생을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