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관계를 위해서는 홀로서기 먼저
7년 전 산재보험 전문 변호사로 첫발을 들이면서, 스승으로 여기고 존경하던 변호사의 히어링을 참관하며 수련 과정을 거치던 중이었습니다. 히어링 전후 그 변호사와 질의응답을 하며, 단독으로 히어링을 수행하기 위한 변호사로서의 기본 소양을 다지는 훈련 과정이었습니다. 히어링이란 우리나라 말로 공판 정도가 될 테인데, 산재보험제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행정판사의 주관 하에 청구인 쪽 변호사와 보험사 쪽 변호사가 모여, 사고 관련 부위, 사고 전 소득, 치료와 수술의 필요성, 미지급된 치료비의 처리, 대체 임금 수준의 결정, 영구적 부상의 정도와 보상 등 산적해 있는 사건 관련 당면 이슈들을 해결해가는 절차입니다.
히어링 후 그 변호사는 제게 대뜸 이런 말을 건네었습니다. “히어링이란 상대방 변호사와 춤을 추는 것이다.” 저는 당시 이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변호사는 검투사, 히어링은 상대방 변호사와 목숨을 걸고 다투는 콜로세움으로 생각하던 저에게, 상대방 변호사와 춤을 추라고 하니 어리둥절했던 것이었습니다. 어렴풋이 이해한 것은 춤이란 것이 어떤 규칙이 있듯이, 히어링이란 것도 어떤 규칙 아래 상대방 변호사와 협력해야 하는 부분이 있구나 하는 정도였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서, 전 그 선배 변호사의 말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어링에서 변호사의 역할은 고전 발레의 수석 무용수를 닮았습니다. 철저한 계급 사회라고 알려져 있는 고전 발레에서 무용수는 크게 세 계급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맨 아래 계급의 무용수가 발레단의 등뼈라고 불리는 코르 드 발레(군무진)입니다. 중간 계급으로는 홀로 춤을 출 수 있는 솔리스트가 있습니다. 가장 높은 계급에 속하는 수석 무용수는 남녀 한쌍이 있는데, 특히 여성 수석 무용수를 프리마 발레리나라고 부릅니다. 프리마 발레니라는 오페라의 프리마 돈나에 해당하는데, 남자 수석 무용수와 함께 화려한 춤을 보여줍니다. 즉, 군무진의 일원에서 출발하여, 단독으로 춤을 추는 솔리스트라는 홀로서기의 과정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남자 수석무용수와 춤을 출 수 있는 프리마 발레리나로 올라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히어링이 발레의 무대라면, 청구인 쪽 변호사와 보험사 쪽 변호사는 각각 남녀 수석 무용수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히어링의 준비는 홀로 추는 솔리스트의 춤과 같습니다. 사건의 초반부터 현재까지의 판결기록과 의료기록을 일일이 살펴보고, 논점을 정리한 후, 행정판사 앞에서 건의하고 해야 할 말과 전개해야 할 논리를 세우는 과정은 고독하기가 솔리스트의 그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히어링에서는 솔리스트가 아니라 프리마 발레리나의 모습으로 보험사 쪽 변호사와 어우러져야 합니다. 나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펼쳐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과 발언, 논리에 따라 시시각각 내가 해야 할 발언과 논리가 바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내가 둬야 할 수가 상대방이 두는 수에 따라 변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스텝에 따라 내 스텝도 바뀌고, 상대방의 손동작에 따라 내 손동작도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내 스텝에 따라 상대방의 스텝도 바뀌고, 내 손동작에 따라 상대방의 손동작도 바뀜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히어링은 홀로 추는 솔리스트의 춤이 아니라, 함께 추는 프리마 발레리나의 춤입니다. 상대방이 두는 스텝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내 스텝만 고집할 경우, 서로의 스텝은 꼬이고 서로의 발을 밟으며 춤은 엉망이 될 것입니다. 남녀 무용수가 무대에 들어설 때부터 나올 때까지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몸동작은 물론 얼굴 표정이라고 합니다. 남녀 무용수가 중력에 역행하여 힘든 점프를 여러 차례 하면서도 얼굴 표정 하나 흩트리지 아니하는 것은 히어링에서 청구인 쪽 변호사와 보험사 쪽 변호사가 감정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는 모습과 닮았습니다.
우리네 삶도 결국 이러한 히어링과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솔리스트처럼 홀로서기에 먼저 성공할 때, 프리마 발레리나처럼 남자 무용수와 춤을 추는 최상위 단계로 접어드는 것처럼, 우리네 삶도 고독 속에 홀로서기에 먼저 성공할 때만이, 남녀 관계, 가족 관계, 고용 관계와 같은 복잡한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느 시인이 얘기했던 것처럼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 만나는 것이 우리의 관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