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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하는 존재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

공감과 동지적 연대감을 향하여

by 뉴욕 산재변호사

나는 산업재해 사건을 주로 다루는 변호사다. 내 의뢰인들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다. 간혹 요구사항이 지나치거나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의뢰인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감정적으로 지치기도 하지만, 나는 그들의 짜증과 무례함이 사고로 인해 삶의 주도권을 잃고 불안과 절망에 빠진 데서 오는 또 다른 고통의 표출임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는 단순히 법률적 도움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우리네 삶의 근본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법정에서 만나는 사건들은 그저 종이 위에 적힌 기록일 뿐이지만, 그 속에는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해온 한 개인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각자의 삶에서 고군분투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세상의 많은 이들이 삶을 즐거움으로만 인식하려 하지만, 그리하여 '행복'을 삶의 궁극적 가치로 삼으려 하지만, 삶의 본질을 '고통'으로 규정한 성인과 철학자도 있었다. 2500여 년 전 부처님께서는 "인생은 고통(苦)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삶은 곧 고통이라는 이 진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어진 깊은 통찰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또한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며, 욕망은 항상 고통을 낳는다”고 말했다. 그의 관점에서 삶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산재 피해자들의 고통은 이 시계추의 한 극단에 놓인 강렬한 통증일 뿐, 그들의 삶에만 국한된 특수한 현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소멸하지 않는 욕망과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각자의 싸움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을 단지 절망의 근원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모든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말로 고통의 긍정적 의미를 역설했다. 그는 삶의 모든 고난과 역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운명애(Amor Fati)’를 통해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니체의 말처럼, 고통스러운 투쟁은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정신을 단련하고 삶에 대한 의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내가 만나는 의뢰인들은 불운한 사건을 겪었지만, 그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려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 모두가 고통 속에서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갈 수 있음을 증명하는 듯하다.


결국, 투쟁하는 존재로서 우리 모두는 동지적 연대감을 가질 수 있다. 내가 의뢰인의 사건을 다룰 때, 단순히 법적 근거를 제시하고 논리를 전개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려 노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그 행위 자체가 숭고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나의 역할은 차가운 법의 잣대로 사건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이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모두가 투쟁하는 전장이기에,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다.


어깨가 무겁고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저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이 말은 나의 아내가 나에게 "사랑해" 다음으로 늘 나에게 듣고 싶어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겪는 싸움을 인정하고, 그의 존재 자체를 존중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전투를 치르며 살아가고 있으며, 서로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은 그 전투를 이어나갈 용기를 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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