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욥기, 그리고 명상록
인간은 문제에 직면하면 본능적으로 그 원인을 찾으려 한다. 심리학에서는 '귀인이론'을 통해 이러한 성향을 설명하기도 한다. 원인을 알아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기에, 문제의 근원을 파고드는 성향은 생존과 번성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잘 부합한다.
이러한 성향은 고난이라는 거대한 문제 앞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난다. 우리는 고난을 마주할 때 "고난은 죄의 결과"라는 단순한 공식을 적용하곤 한다.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암 진단을 받고,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잃거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상황을 겪게 되면 우리는 무의식중에 이렇게 외치게 된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벌을 받는 거지?"
하지만 이 단순한 인과율은 언제나 옳을까?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은 이 질문을 극적으로 던지며, 성경 속 욥기는 수천 년 전부터 이미 동일한 문제를 신학적으로 깊이 다루고 있다. 그리고 고대 로마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이 문제에 대한 또 다른 깊은 통찰을 제시한다. 이 세 작품을 통해 우리는 고난을 단순히 형벌로만 보는 인간적 사고의 위험성과, 그 이면에 담긴 더 깊은 섭리에 대한 성찰을 발견할 수 있다.
<지옥> 속 사람들은 죽음의 고지를 받고, 정해진 시간에 괴물들에게 처형당한다. 사회와 종교 단체는 이를 "신의 심판"으로 규정하고, 형벌을 받은 이는 예외 없이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고난은 개인의 죄와 직결되고, 공동체는 극심한 두려움과 통제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 공식에는 균열이 생긴다. 죄와 상관없는 이들, 심지어 무고한 아기조차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때 시청자들은 근본적인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정말 신의 공의인가?"
성경은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기 1:1)로 묘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산과 자녀, 건강을 모두 잃는 극심한 고난을 겪는다. 욥의 친구들은 <지옥> 속 군중들처럼 "네가 죄를 지었으니 이런 벌을 받는 것이다"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욥의 고난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다. 사탄의 공격조차 하나님의 주권적 허락 아래 있었던 것이다. 욥의 고난은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시험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깊은 신비를 드러내는 통로였다.
한편, '명상록'의 저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고난의 원인에 대해 깊이 파고들기보다 고난을 마주하는 '나 자신의 태도'에 집중한다. 그는 "불행한 일이 너에게 닥쳤다고 말하지 말라. 그런 일이 너에게 닥쳐도 꿋꿋이 견뎌낼 만한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라"고 말한다.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이며,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내면의 반응이다. 명상록의 관점은 고난을 운명이나 벌로 받아들이는 대신, 내면의 평정을 유지하고 이성을 통해 극복해야 할 문제로 본다.
<지옥>과 욥기, 그리고 명상록의 공통점은 고난을 단순히 "형벌"로 해석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정면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 작품 모두 그 단순화된 해석을 철저히 전복시킨다. <지옥>은 죄 없는 이들이 고난받는 모습을 통해 "고난은 곧 심판"이라는 공식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욥기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그 공식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며, 명상록은 고난에 대한 외부적 해석을 넘어 내면적 수용과 성찰을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지옥>이 던진 질문은 욥기의 오래된 질문과 맞닿아 있으며, 명상록은 그에 대한 또 다른 해답을 제시한다. 고난은 반드시 죄의 결과인가? 성경은 이에 대해 명확히 "아니오"라고 답하며, 고난은 하나님의 주권과 신비를 드러내는 장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명상록은 고난 자체의 원인보다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더 중요함을 일깨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만날 때 해야 할 일은 타인을 정죄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게 구하고 우리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며 신앙의 깊이를 더해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