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너, 나 감당할 수 있겠냐?"

우리는 무엇을 감당하며 살아가는가?

by 뉴욕 산재변호사

"너, 나 감당할 수 있겠냐?"


영화 <신세계>에서 조직의 2인자 정청 (황정민 역)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경찰 스파이이나 자신의 수족부하였던 이자성 (이정재 역)에게 던지는 이 대사는 단순한 경고를 넘어선다. 그것은 이자성이 앞으로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 곧 배신과 위선으로 얼룩진 세계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이 짧은 한마디는 비단 영화 속 두 인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적 화두를 제시한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그리고 얼마나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감당한다는 것은 단순히 견뎌낸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그것은 주어진 상황, 혹은 스스로 선택한 결과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르는 책임과 고통, 그리고 기쁨까지 포용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성공이라 부르는 것들은 종종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의 한계를 시험한다. 이에 대한 영적인 관점을 제공하는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닥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이 구절은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어려움이 결국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는 믿음을 준다. 물질적 풍요를 감당할 정신적, 도덕적 역량이 부재할 때 벌어지는 비극의 이야기는, 이들에게 돈이 축복이 아닌 파멸의 씨앗이 되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재산을 감당한다는 것

재산은 단순히 물질적 가치를 넘어, 한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 거대한 힘이다. 그러나 이 힘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때, 재산은 자유가 아닌 속박이 되고 행복이 아닌 불행의 원천이 된다. 우리는 로또 당첨자의 비극적인 말로를 종종 접한다. 갑작스럽게 손에 들어온 막대한 부를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무절제한 소비와 방탕한 생활로 결국 모든 것을 탕진하고, 예전보다 더 불행한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이는 돈을 관리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돈이 가져오는 삶의 변화를 감당할 가치관과 철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채근담은 다음과 같은 통찰을 제공한다.


勢利紛華 不近者爲潔, 近之而不染者爲尤潔。 ("권세와 이익, 영화로움과 화려함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도 깨끗한 것이지만, 그것들을 가까이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것이 더욱 깨끗한 것이다.")


이는 돈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소유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내면의 그릇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단순히 재물을 멀리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넘어, 재물 속에서도 자신의 본질을 잃지 않는 적극적인 감당의 자세가 필요하다.


건강을 감당한다는 것

우리가 감당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 즉 건강이다. 신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칼로리를 섭취하면 몸은 비대해지고 병든다. 마찬가지로, 정신이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와 감정을 억지로 품고 있으면 결국 마음의 병을 얻게 된다. 현대 사회는 풍요와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무리를 요구한다. 매일 쏟아지는 자극과 정보, 끝없는 성과에 대한 압박 속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치를 잊고 무모하게 질주한다. 그러나 진정한 건강은 단순히 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춰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서 비롯된다. 채근담은 이러한 균형의 미덕을 이렇게 표현한다.


滋味濃時 減三分嗜, 意趣濃時 減三分取。("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그 맛을 삼분의 일쯤 덜어내어 즐기고, 흥취가 한창 무르익을 때에는 삼분의 일쯤 덜어내어 취하라.")


이는 쾌락과 욕망이 극에 달했을 때 절제하고 덜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감당의 지혜임을 시사한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지나친 것을 경계하고, 넘치지 않게 조절하는 중용의 태도가 필요하다.


정치를 감당한다는 것

정치와 사회의 영역에서도 ‘감당’의 철학은 유효하다. 한 사회가 품을 수 있는 이상과 변화의 폭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시대를 앞서가는 정치인의 진취적인 비전이 당시 사회 구성원들의 정서적, 문화적 역량을 넘어서게 되면, 그 변화는 오히려 혼란과 갈등을 초래한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보며 많은 이들이 '시대를 감당하기 어려운 앞선 정치인'을 가졌던 비극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지도자의 이상과 대중의 현실 사이의 간극이 가져온 슬픈 결과였다. 모든 변화에는 그 변화의 무게를 감당할 사회적 합의와 성숙이 필요하며, 이는 지도자뿐 아니라 시민 모두의 몫이다. 채근담은 지도자의 역할과 감당의 무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居官有二語曰 淸 愼。 居家有二語曰 勤. ("벼슬하는 데에는 두 가지 말이 있으니 '청렴'과 '신중'이요, 집에 있을 때에는 두 가지 말이 있으니 '부지런함'과 '검소함'이다.")


이는 한 사회를 이끄는 자는 '청렴함'과 더불어 '신중함'을 감당해야 함을 강조한다. 변화를 추진할 때는 대중의 현실과 역량을 신중하게 살피는 지혜가 필수적이다. 지도자 한 명의 열정만으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으며, 공동체가 함께 그 무게를 짊어질 준비가 되었는지를 살피는 신중함이 바로 리더십의 감당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감당의 철학'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나는 지금 내가 가진 것을 감당할 수 있는가?", "내가 욕망하는 것을 얻었을 때 그에 따르는 책임과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들은 성장의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자기 성찰의 과정이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쥐려 하기보다는,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고, 동시에 감당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진정한 성숙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감당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길러내는 데 있을 것이다.


정청의 질문은 단순히 이자성을 향한 것이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엄중한 물음인 이유이다.

keyword
이전 07화고난의 의미에 대한 성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