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옷자락과 김춘수의 '꽃'
김춘수 시인의 명작 '꽃'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구절로 존재의 의미와 관계의 본질을 깊이 탐구한다. 이 시는 어떤 존재가 타인에게 인식되고 의미 부여될 때 비로소 온전한 존재가 된다는 철학적 통찰을 담고 있다. 놀랍게도, 성경 속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의 이야기는 이 시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아름다운 응답이자,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인간의 보편적인 갈망을 보여준다.
이러한 존재의 의미 부여는 니체의 철학과도 닿아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는 인간이 스스로의 의미를 창조하고, 고통 속에서도 '힘에의 의지'를 통해 자신을 극복하며 새로운 가치를 정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혈루증 여인의 절박한 몸짓은 단순히 치유를 바라는 것을 넘어, 자신의 무의미한 존재를 '몸짓'에서 '꽃'으로 변화시키려는 강렬한 의지의 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녀는 사회적 낙인과 육체적 고통이라는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는 희망을 향해 나아감으로써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재정립하려는 투쟁을 벌인 것이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된 존재였다. 율법에 따라 부정한 자로 여겨져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었고, 모든 재산을 탕진하며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고통까지 감내해야 했다. 그녀는 이름 없는 존재,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수많은 군중 속에 섞여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고통과 존재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마치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표류하는 '몸짓'과 같았다. 그녀에게 치유는 단순히 육체의 회복을 넘어, 다시 사람들의 시선 속으로 돌아와 '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는 존재론적 갈망이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여인은 마지막 희망을 품었다. 그녀는 예수님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진다면 치유될 것이라는 절박한 믿음이 그녀를 움직였다. 군중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행위는, 마치 김춘수 시의 화자가 이름을 부르기 전의 대상처럼, '다만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몸짓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의미를 부여받고 싶다는 간절한 외침이었다.
예수님은 군중 속에서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은 수많은 군중 속에서 '이름 없는 몸짓'이었던 여인을 특정하여 부르는 행위였다. 두려움에 떨며 자신의 행위를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그녀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고 말했다. 이 순간, 그녀는 비로소 '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존재를 인정받았다. 그녀의 병이 나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적으로 격리되었던 그녀의 존재가 예수님에 의해 '구원'받고 '평안'을 얻은 것이다.
김춘수 시인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었듯이, 예수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알아주시고 '딸'이라 불러주셨을 때, 그녀는 비로소 온전한 존재, 즉 '꽃'이 되었다. 육체적 치유는 그녀의 존재가 다시금 세상 속에서 의미를 찾고, 사람들과 관계 맺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그녀는 더 이상 부정하고 소외된 '몸짓'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고 평안을 얻은 한 사람의 '꽃'이 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의 옷자락 만지며" 찬양 가사 중 "나의 왕관을 놓으리"라는 구절은 깊은 의미를 지닌다. 이는 혈루병 여인이 짊어졌던 사회적 낙인과 고통, 즉 '다만 하나의 몸짓'이자 '억압받던 몸짓'으로서의 과거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벗어던지는 행위를 의미한다. 스스로에게 씌워져 있던 부정함과 무의미함의 '왕관'을 벗어던지고, 예수님으로부터 새롭게 부여받은 '딸'이라는 이름과 그 안에 담긴 사랑과 평안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자신을 내려놓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해방을 상징한다.
이처럼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의 이야기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 보여주는 존재론적 의미와 깊이 연결된다. 진정한 치유와 구원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의 제거를 넘어, 한 존재가 타인에게 인식되고, 그 이름이 불리며, 의미를 부여받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이름을 불려 '꽃'이 되기를 갈망하는 존재이며, 예수님은 바로 그 이름을 불러주시는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