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결혼, 그리고 이야기: 시대의 거울에 비친 관계의 역사
아내가 요즘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 푹 빠져 있다. 도대체 몇 번째 반복 시청인지 셀 수조차 없다. 어느 날, 드라마에 몰입하던 아내가 불쑥 내게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6개월 만에 그렇게 쉽게 결혼했지?”
그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우리가 걸어온 시간을 되짚게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은 자연스럽게 ‘사랑과 결혼’이라는 오래된 주제로 나를 이끌었다.
사랑과 결혼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소재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 둘을 바라보는 시선은 시대와 사회, 그리고 문화를 거치며 끊임없이 변해왔다. 한때 결혼은 가문과 가문을 이어주는 엄숙한 ‘계약’이었다. 개인의 감정보다는 혈통의 유지와 사회적 지위를 우선시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하지만 오늘날 결혼은 대체로 ‘사랑’이라는 개인적 감정의 결실로 여겨진다. 이 인식의 전환은 단순히 사회 발전이나 제도 변화의 결과만은 아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수많은 ‘이야기’, 즉 문학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그 이미지를 그려내고, 반복하고, 공고히 하면서 만들어낸 문화적 현상이다.
조선시대의 결혼 풍속은 철저히 신분과 가문 중심이었다. 양반 자제라면 비슷한 신분의 규수와 중매를 통해 혼인하는 것이 당연했고, 사랑은 결혼의 필요조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전 소설 『춘향전』은 이러한 관습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변 사또의 수청 요구를 거부하고 이몽룡에 대한 정절을 끝까지 지키는 춘향의 이야기는 단순히 ‘열녀’의 덕목을 찬미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신분을 초월한 개인의 사랑이 얼마나 고귀하고 지켜낼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강력한 선언이었다.
이몽룡과 춘향의 결혼은 당시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그들의 사랑은 결국 사회적 승인을 받는다. 이몽룡의 장원급제와 함께 춘향이 정실부인이 되는 결말은, 허구일지라도, 사랑이 결혼의 전제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당대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주었다. 이는 신분제 사회의 굳건한 질서 속에서도 개인의 감정이 존중받기를 바라는 대중의 염원이 반영된 결과였다.
비슷한 변화는 서구에서도 나타났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 낭만주의는 개인의 감정과 내면의 열정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웠다. 산업혁명 이후 부상한 신흥 중산층은 전통 귀족 사회의 정략결혼에서 벗어나 개인의 행복과 선택권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소설, 특히 대중에게 널리 읽힌 연재소설은 ‘사랑 없는 결혼은 불행하다’는 인식을 사회 전반에 퍼뜨렸다.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작가들은 신분 차이를 넘어 진정한 사랑을 쟁취하는 주인공을 내세웠다. 독자들은 주인공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결혼이란 무엇보다도 사랑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강화했다. 활판 인쇄술과 신문 연재의 확산은 이 새로운 결혼관을 사회 구석구석에까지 전파했다.
『춘향전』과 서구 낭만주의 소설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유사한 통찰을 전한다. 두 경우 모두 결혼을 ‘가문의 결합’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감정’에 기반한 선택으로 그린다. 이러한 이야기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독자의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현실의 결혼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친 문화적 주체였다.
이러한 결혼관의 변화는 과거 문학에서만 멈추지 않았다. 21세기에도 대중문화, 특히 드라마와 영화는 여전히 ‘사랑이 결혼의 전제’라는 서사를 반복하며 확산시킨다. 최근 몇 년간 인기를 끈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드라마의 출발점은 매우 현대적이다. 주인공 남녀는 철저히 ‘계약 결혼’을 선택한다. 경제적 필요와 생활 안정이라는 명확한 이해관계 속에서 동거를 시작하지만, 이야기는 곧 예상치 못한 전개로 흘러간다. 처음에는 감정을 배제한 생활을 유지하려 하지만, 함께 지내는 과정에서 서로의 상처와 꿈을 이해하게 되고,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튼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실질적 계약에서 시작했더라도, 진정한 결실을 맺는 순간은 여전히 사랑의 발견일 때라는 점을 드라마는 강조한다. 이는 『춘향전』이나 19세기 낭만주의 소설과도 닮아 있다. 출발점은 다르지만, 결론적으로 “사랑 없는 결혼은 온전하지 않다”는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다만 현대 드라마는 과거 문학과 달리, 현실의 복잡한 경제 문제나 개인의 삶의 궤적까지 함께 다루며, 사랑이 어떻게 다양한 제약 속에서도 성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현대의 시청자는 과거의 독자처럼 스스로를 주인공에게 투영하며, 사랑이 단순히 결혼의 조건이 아니라 결혼을 ‘완성’시키는 본질이라고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된다. 드라마와 영화는 여전히 ‘사랑=결혼’의 공식을 재생산하며, 동시에 오늘날의 사회 문제와 결합해 더 현실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로 진화시키고 있다. 우리가 사랑을 결혼의 핵심 조건으로 당연시하는 것은, 법이나 제도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이 ‘이야기들’ 덕분이다. 문학 속에서 반복 재생산된 사랑의 이상은 결국 현실의 결혼관에 스며들어,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선택을 바꿔놓고 있다.
문득 돌아보면, 아내와 내가 6개월 만에 결혼을 결심한 것도, 어쩌면 오랜 세월 우리 안에 각인된 수많은 이야기의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드라마 속 대사처럼, 사랑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믿게 만든 그 이야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