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꼼한 잡담
엄마가 아들을 꾸짖는 것,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는 것,
목사가 설교하는 것을
대화라고 하지 않는다.
대화란,
한 편에서 다른 편으로 보내는 일방적 신호가 아니다.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언어적 또는 비언어적인 것의 총체라 할 만하다.
세 가지 주제가 등장하는데.
‘관계’, ‘영향’, ‘총체’다.
관계란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서
타인의 이해를 목표한다는 점이다.
나의 언어가 상대방에게 이해되어야 의미가 있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나 나의 지적 유희를 위한 문장을 늘어놓고는
‘알아 들었지?’라고 묻는 것은 대화가 아니다.
아이를 호되게 꾸짖을 때 아이는 자신의 의견을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묵묵히 듣다가.
마지막. 알아 들었지?라는 질문에 ‘예’라고 답한다.
다른 이유와 설명을 이야기하려 할 때
잘 들어주는 부모라면 대화가 가능한 부모일 것이나.
많은 경우 ‘알아 들었지?’라는 질문으로 끝나고 ‘예’라는 답변으로 종결된다.
이는 대화일 수 없다.
교회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말은 ‘아멘’이다.
설교자는 왜 자꾸 자신의 이야기 끝에 회중에 대하여 ‘아멘’을 유도하는 말을 반복한다.
‘할렐루야’, ‘아멘입니까?’, ‘아멘이죠?’, ‘아멘 하세요’!, ‘아멘을 해야 할지!’
‘아멘’을 외치는 회중은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아니 ‘아멘’만 하면 신령한 지혜로 번뜩 알게 되는 걸까?
관계가 살아나기 위한 대화는
나의 의견과 생각을 전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잘 이해했는지 살피는 것이어야 한다.
혼자만 씨부렁거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타인도 함께 공감할 수 있기 위하여, 목표와 지향에 대한 공감과 지지를 얻기 위하여
대화가 필요하다.
두 번째는 ‘영향’인데
대화는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좋은 영향이든 그 반대의 경우이든 대화를 통해 서로의 생각과 일상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시시콜콜한 수다에도,
공감과 웃음, 슬픔, 동의, 등으로 반응하고,
그 반응에 따라 대화는 이어져 간다.
지식의 일방적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강연자도,
회중의 태도와 반응에 강연의 밀도가 달라진다.
좋은 강연에 눈물을 흘리거나, 일상의 방향을 바꾸는 이도 있다.
생각뿐만 아니라 행동을 바꾸기도 하고, 삶의 지향을 전환하기도 한다.
이것은 대화가 가진 힘이다.
세 번째는 ‘총체’인데,
대화는 언어적 기호와 소리에만 국한되지 않고,
비언어적인 것도 포함한다.
태도, 억양, 장단, 손짓, 몸짓, 눈빛 등 비언어적 대화를 통해 우리는 서로의 뜻을 읽는다.
정중한 언어에도 상대에 대한 비아냥이 담길 수 있다.
‘피식’ 내뱉는 숨소리가 타인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언어가 아니어도 따뜻이 잡은 손으로 상대를 공감하고 마음을 이어갈 수도 있다.
대화는 우리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은…
이 대화를 참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