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꼼한 잡담 |
"누구나 어떠한 면에서는 소수자일 수 있다. 소수자에 속한다는 것은 다수자와 다르다는 것일 뿐, 그 자체로 틀리거나 잘못된 것일 수 없다.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 2023년, 서울고법 행정 1-3부 이승한 재판장의 말 중에서
살아가는 사회와 우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은 ‘소수자’ 입장에 서 있다.
예를 들어 ‘US 달러’를 기준하여 사용하지 않는 Asia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대한 경제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국가의 통제를 받고 있다.
그 통제가 자신이 원한 것이든 원하지 않은 것이든 상관없다. 단지, Asia에서 태어났다는 지리적 조건만으로도 통제와 억압의 대상이 되는 소수자다.
지리적 조건뿐만이 아니다. 다양한 환경에서 우리는 소수자가 된다.
근로자의 다수성이 관리자의 소수성에 소멸하기도 한다.
그래서 수량의 다수성이 다수자가 아닌 상황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공통 인식이 다수성으로 치환하여 힘을 가지는 경우에도,
공통 인식이 올바르지 않을 수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공통 인식이 다른 인식으로부터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는 자세가 없다면 다수성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다름없다.
사람은 다수성을 확보한 다수자이고 싶어 한다.
계속해서 자신의 소수성을 부정하려고 하고,
다수자의 입장을 따르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보상받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다수성과 다수자의 입장을 매도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소수성과 소수자에 대한 생각과,
나 또한 어떤 면에 있어서는 소수자임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수가 권리와 물질의 소유를 위해 경쟁할 때
그 경쟁을 포기한 소수가 어리석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형화하고, 문화적으로 매력적인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그렇다고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잉여와 루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왜 자꾸 다수자의 입장에 서서 다수자를 변호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는 것일까?
다수자의 입장은 굳이 내가 아니어도 충분하게 들리고 변호된다.
하지만, 소수자의 입장과 언어는 누군가 그들의 언어를 끄집어 내 주기까지 묵음과 같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지 않았느냐?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예레미야 22:16)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이사야 1:17)
이 말은 옳다.
소수자의 입장에 서서 변호하는 일이 소중하다.
나 또한 어떤 면에 있어서는 소수자이며, 누군가 나의 목소리를 대신하여 말해 주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언어가 다른 지역에 가면 통역하는 이의 도움을 받는다.
그 지역에서 나는 소수자고, 필요를 위해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필요가 충분하지 못하면 괜히 짜증 난다.
언어가 다른 소수의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질책을 서슴없이 한다.
당신들은 배려와 매너가 심각하게 부족하다고 항변한다.
그러면서도 환경이 바뀌면 다수자에 속해 소수자를 가벼이 여긴다.
나는 다수자인가 소수자인가?
나는 다수자로 사는가? 소수자로 사는가?
다수자와 소수자 사이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