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을 이끄는 '앎', '앎'을 증명하는 '실천'

꼼꼼한 잡담 |

by 꼼꼼

‘앎’과 ‘실천’을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하지만 ‘앎’과 ‘실천’이 삶의 한 길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어떤 이들은 ‘앎’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며,

어떤 이들은 ‘실천’을 더 가치 있다고 말한다.


오래된 과거에는 ‘실천’이 먼저였을 것이다.

살아감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는 것에서 ‘앎’이 만들어진 이야기를 우리는 자주 듣는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들을 산에서 하나님에게 제물로 드리려는 무자비한 실천에서 그는 모든 것을 준비하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임을 알게 되듯이 말이다. 야곱의 이야기도 그렇다. 강가에서 무작정 씨름한 결과가 알고 보니 자신이 하나님과 만난 것임을 뒤늦게 깨닫고 놀란다.


이런 이야기는 성서라는 특수한 맥락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다 보니 어디엔가 닿아 있는 삶을 오늘도 경험한다.


그렇다고 실천이 더 먼저이며 중요하다고만 생각하려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실천’에 의미가 붙여지지 않으면 ‘공허’할 수밖에 없다.

‘앎’은 ‘실천’의 목적지를 알려 주며, 방향을 가리킨다.


북극을 가리키지만 흔들리는 나침반의 침처럼, 흔들리는 우리 실천을 목적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붙드는 힘은 ‘앎’에서 나온다.


‘실천’의 존재를 알려주는 ‘앎’과

‘앎’의 생기를 불어넣는 ‘실천’은

삶의 길’들’이 아니라 삶의 한 ‘길’이다.


사랑, 평화, 정의, 하나님, 기도 그리고 삶의 수많은 단어들…


‘앎’은 그것에 대한 ‘실천’을 이끌고

‘실천’은 그것에 대한 ‘앎’을 증명한다.


무자비한 정의의 실천은 정의를 무자비함으로 알기 때문이며,

혐오하는 진리의 실천은 진리를 혐오함으로 알기 때문이다.

소란과 분열의 실천은 소란과 분열의 앎을 증명하는 것이며,

침묵과 머뭇거림의 실천은 침묵과 머뭇거림의 앎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늘도

‘앎’과 ‘실천’의 한계를 마주하며,


다시 ‘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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