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 시를 쓰기 시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을 말하자면, 그 사람들은 상처와 영혼이 말하는 것을 듣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시인은 이렇게 탄생한다. 오랜 기간 조금씩 축적된 상처로 영혼은 작게 소리 지르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가 깊지 않기에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살지만 영혼과 상처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하면 몸이 아프거나 갈등을 겪게 된다. 그러면서 겉 껍데기가 하나씩 떨어진다. 그렇게 자신은 하나씩 해체되기 시작한다.
껍데기가 모두 까지고 나면 상처와 영혼이 말하는 목소리를 더욱 선명하게 들을 수 있다. 처음에는 당황할 것이다. 내면의 목소리와 사회적 관습의 차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러나 완전한 해체를 겪게 되면 결국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가게 된다. 그렇게 상처를 직접적으로 직면한다. 상처를 직접적으로 직면하게 되면 상처를 조금씩 도려낼 수 있다. 이 과정 역시 엄청나게 고통스럽다. 상처를 직면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일 텐데, 그것을 도려내는 것의 통증을 상상할 수조차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게 곪아버린다. 곪아버린 상처는 인격을 오염시키기 시작한다. 대부분은 그렇게 죽어간다.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사회적 역할과 가면에 눈을 가린 채로 죽어간다. 삶이란 무엇인지의 고민은 사춘기 때 잠깐 거쳐간다. 자기가 죽어갈 때 다시 고민하게 된다. 그때가 돼서야 곪아버린 상처를 직면한다,
상처와 영혼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하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것을 도려낼 수 있게 된다. 엄청난 고통을 참고서 그것을 조금씩 도려내면 그 자리에서 새 살이 돋아난다. 새 살을 잘 기르고 키워내면 곪아버린 상처는 치유되고, 공허감은 새로운 삶의 의미로 덮어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아직 나 자신도 그것을 이뤄내지 못하였다. 단지 책과 몇몇 경험으로 보았을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전 생애를 거쳐도 한 두명 정도 보일 것이다. 막상 본다고 해도 상처를 직면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런 사람을 알아차릴 수도 없다. 그런 사람은 마냥 사람 좋아보이고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기 때문이다.
상처와 영혼이 말하는 목소리를 그대로 옮겨 적으면 가끔 이상하기는 해도 시처럼 나온다. 그게 내가 시를 쓰기 시작한 이유이다. 그저 들리는 것을 텍스트로 옮기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한 일은 시를 쓴다는 것은 상처를 도려내는 것과 같다. 그리고 상처를 모두 도려내면 영혼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게 된다. 한 사람의 행복에 있어서는 그게 좋은 일이겠지만 시를 쓰지 못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무한한 공간에서 현재를 느끼는 경험 그것이 가져다주는 쾌락은 깊은 상처만큼이나 강렬하다. 가질 수 없는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 마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