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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성윤 Aug 04. 2024

바벨탑: 오만의 끝


태초부터 존재했던 오만의 죄


디오게네스에게 망신당한 플라톤은 인간을 두 발로 서는 털 없는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뛰어난 철학자도 확실하게 무언가를 정의하고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현대인은 과거의 실패를 인지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모든 것을 규정하고 정복하려는 욕구가 분출한다. 인간의 욕심은 아마 본능일지도 모른다. 아득히 먼 과거에, 인간은 하늘에 오르기 위해 바벨탑을 건설했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을 기리기 위한 탑이 아니었다. 바벨탑의 건설은 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든 인간은 조물주를 배반하고 마침내 신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넘쳐나는 금은보화, 끝이 보이지 않는 제국의 경계선,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강대한 권력에 인류는 하늘에 군림하고자 했다. 그 결과는 비참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채워질 수 없었다. 제국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문화, 언어, 사회를 공유했던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바벨탑의 이야기는 현대인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특히 종교의 몰락과 함께 도래했던 합리성의 시대에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이성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합리성의 목표는 주관성의 확립과 동일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 그것이 합리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공리주의의 목표였다. 하지만 근대성은 수 차례의 대규모 전쟁, 인간성을 상실한 관료제, 불완전한 실증주의, 과학적 편견을 낳게 된다. 사람들은 빈곤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지만, 새로운 형태의 지옥이 나타났다. 서류의 적힌 숫자들은 냉혹했고 사람들은 명령을 따르는 자동인형이 되어갔다. 그곳은 유토피아가 아니었다.


기술의 진보는 많은 사람들의 고민을 지웠는데, 생존과 가난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기술의 발전, 효율성의 극대화, 대규모 노동력은 사람들에게 여유로운 생활을 선사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처럼 끊임없이 움직인다. 하지만 전문성과 합리성은 여전히 자비가 없다. 이것에 집중하지 않으면 더 높은 곳으로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부가적인 가치까지 생각할 수 없다. 경쟁에서 한 눈을 팔면 그 즉시 상대방에게 추월당한다.


바벨탑은 낡은 고대의 신화가 아니다.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현대에도 유효하다. 기술의 발전이 영적, 도덕적 성숙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이 쌓고 있는 것은 또 다른 바벨탑이다. 행복은 탑의 높이에 달려 있지 않다. 근대성 결국 실패했다. 물질은 모든 것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모든 것을 이룬 사람들은 공허감을 메꾸기 위해 방황한다. 결론적으로 바벨탑의 심판은 현대성이 가진 오만함을 반성하게 하고 겸손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기술 발전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인간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공리주의의 역설적인 목표처럼, 궁극적인 목표는 인류의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기 문이다. 수천 년의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모든 사람들이 고민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개인의 편의와 욕망을 넘어서 인류 공동체를 위해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한 방향성을 찾아 나아가야 할 것이다. 바벨탑의 이야기는 이러한 점에서 교훈을 주고 있다.






바벨탑


감히 신에게 도전하려는 자
인간의 오만함에 벌을 내리노니
하늘 끝까지 닿은 탑을
다시 땅으로 돌려보내노라

인간은

탑의 잔해물에 깔려
여러 갈래로 나뉘고
본성을 잃었으니
서로 반목하고 질투하며
다시는 신에 가까워지지 못하노라

수천 년이 흘러
인간들은 다시 모이고
두 번째 바벨탑을 건설하고 있으니
어찌 과거의 속죄에도
그 죄악을 버리지 못하느냐

새로운 탑이 
다시 하늘 끝에 도달할 때에
두 번째 심판이 당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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