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클로즈>
레오와 레미가 겪은 비극은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편적이고, 평범한 경험에 가까웠다. 학창 시절은 누구나 순수하고 싱그러우나 예민하고 섬세하며, 그렇기 때문에 복잡하다. 어른들은 본인들의 편의에 따라 모르는 아이들을 한데 모아두고 친해지도록 방치한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는 말로, 학창 시절은 친구를 사귀기 좋은 시기로 포장한다. 그러나 그들도 겪어봐서 알지 않는가. 오히려 어른들의 친구는 속편 하다. 서로 이익에 의해 만나기 때문에 숨길 것 없이 적당한 거리를 알게 되고,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끼리 모일 수 있다. 요즘은 특히 어플이나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임이 활성화되어,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더 쉽게 만날 수 있는 세상이지 않은가.
아이들의 경우는 정반대다. 취향이나 성격, 관심사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교실에 집어넣고, 무작정 친해지길 강요한다. 오히려 아이들의 관계는 어떤 이해관계도 없이 순수하고 깨끗하여, 우정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엮이지 않는다. 그래서 너무도 깨지기 쉽다. 레오와 레미가, 친구들의 짓궂은 말에 서서히 멀어진 것처럼. 아이들은 친구 관계를 끊는다고 해서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저 친구 한 명이 사라지고, 한 반에서 또 다른 친구 한 명을 사귀면 그뿐.
어릴 땐 레미에 가까웠다. 나는 주로 버림받는 쪽이었다. 나는 평범하고, 지루한 아이였다. 물론 늘 혼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렵게 친해진 친구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서서히 멀어졌다. 나에게서 더는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해서였을까. 재미나 매력을 찾지 못해서였을까. 아니면 그들도 레오처럼 누군가에게 놀림을 받았던 걸까. 그래서 증명해야 했을까. 내가 아닌 더 힘 있고 재미있는 누군가와 친해져야 할 만큼. 그러나 나는 레미처럼 용기 있지 못했다. 왜 나를 버렸는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화를 주체 못 해 들이받는 쪽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비극의 주인공이 된 마냥, 그대로 버려질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그것마저 재미없었을까.
조금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레미보다는 레오 쪽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버림받기보단 누군가를 버리는 쪽이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증명해야 했다. 찌질한 아이들 틈이 아니라 어떻게든 평범한 그룹에라도 속하고 싶었다. 내가 속한 무리가 나를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그래서 기껏 친해진 친구를 버렸고, 뒤처지는 무리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다. 매점을 갈 때도, 하교할 때도, 원치 않는 무리의 친구들과는 건성으로 대화했다. 빨리 가야 한다고 거짓말하거나, 새롭게 친해진 친구에게 일부러 대화를 걸고, 어떻게든 친해 보이려 애썼다. 마찬가지로 레미처럼 나에게 따져 묻는 아이들은 없었다. 왜 자신을 버렸냐고. 이유도 없이 설명도 없이 어째서 멀어지는 것이냐고. 그럴수록 상처받는 것은 나였다. 안도보다는 의문이 들었다. 그들에게도 나는 별 것 아니었을까. 나는 여전히 재미없었던 걸까. 버리려 했지만, 또다시 버려지는 것 같은 기분.
어른들이 말하던, 친구를 사귀기 쉬운 그 시기를 결국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없이 지나왔다. 레오와 레미처럼 버리고 버려진 끝에, 아무도 남지 않는 결말이었다. 지금은 다행히 누군가를 쉽게 버리지 않는다. 여전히 나를 버리려는 사람들에게, 이유를 따져 물을 만큼 용기 있진 않지만, 적어도 버림받지 않으려 노력한다. 나는 다만 레오의 눈빛이 서글펐다. 레미를 버리고 살아가는 평범한 생활,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불쑥불쑥 등장하는 상실의 아픔, 그리고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인정하고 내뱉게 되는 용기 있는 고백.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어린 시절 경험한 사무치는 상실의 경험으로, 레오는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나는 내가 겪어온 미지근한 상실로 이렇게 미지근한 사람이 되어 버렸는데. 레오는 누구에게든 뜨거울 수 있겠다 생각하니, 그 강렬한 아픔이 아리면서도 질투심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