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어느 자식이나 그렇듯 나는 부모님의 어린 시절을 모른다. 이름은 무엇이며, 몇 년도에 어디에서 태어났고 형제자매는 몇이며, 우리를 낳고 어떤 세월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 외에 내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관심을 가졌더라면 알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식이라면 응당 그러하지 않은가. 무척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살아계실 땐 그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너무도 통속적이지만, 부모님은 그저 태어날 때부터 나의 부모님이었겠거니 여겼다. 내가 세상에 존재하기 이전의 그들을 생각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나 이전에도 세상은 존재했을 테고, 그들이 그 세월을 거쳐왔기에 내가 멀쩡하게 앉아 글을 쓰는 것일 테지만.
반대로 그들은 왜 그런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려 하지 않았을까. 먼저 나서서 본인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릴 때 꿈이 무엇이었으며,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어떤 분들이었고, 어떤 친구들과 주로 어울렸는지. 학창시절 취미나 특기는 무엇이었는지. 우리처럼 연예인을 좋아했는지. 그런 것들을 왜 이야기하지 않았었는지 아니면 이미 내가 흘려버린 탓일까. 잘 모르겠다. 그들이 하지 않았는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이런 것조차 기억하지 못할 만큼 관심이 없었던 것이라고 해두어야겠다.
꿈이 여러 번 변했다. 그 끝엔 모두 작가가 붙었지만, 소설작가에서 드라마작가, 또 방송작가로 수식하는 말이 계속해서 변했다. 결국엔 쓰는 일의 언저리에 머물렀다. 오직 쓰는 일로 먹고 살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쓰는 일을 포기하진 않았다. 나는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다. 내 안에 무수한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날카롭고 차가운 세상에 따뜻한 이야기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매번 좌절했다. 이야기가 깊어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미 잡을 수 없게 두둥실 떠오른 풍선처럼 붕 떠버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허구의 이야기라도 철저한 현실이 기반이 되길 원했으나, 자꾸 허구의 이야기만 맴돌았다. 나조차 공감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 어디에나 있을 법하지만, 진정성이 없는 그저 그런 이야기. 그때 처음 부모님을 돌아봤다. 부모님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내가 겪어보지 않은 세대를, 누구보다 격정적인 시대를 거쳐온 분들인데. 아마도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그들에게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한 번도 관심 가지지 않았던 이야기.
<디어 마이 프렌즈>의 박완은 엄마에게 바치는 소설을 쓰기 위해 엄마와 그녀의 친구들을 취재한다. 그녀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아픔을 겪어왔는지, 그녀들의 과거가 박완, 그러니까 고현정의 목소리로 드라마 전반에 흘러나온다. 결국 모든 과거가 현재의 그녀들을 만들어냈다. 가슴에 돌덩이만한 아픔을 묻어두고 하하호호 죽음을 농담 삼아 낄낄거리는 노인네들. 때로는 찬란하고 때로는 처절한 기억. 박완이 엄마를 비롯해 그녀의 친구들을 하나하나 앉혀놓고 이것저것 물을 때, 나는 내 앞에 누굴 앉혀놓을 것인가 고민했다. 우선 아빠와 엄마를 앉히고, 그리고 나면? 부모님과 어린 시절을 공유한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 과거의 기억을 함께 나눌 만한 사람들은 또 누구인가. 쉽사리 떠오르는 인물들이 없었다. 그렇다. 나는 그토록 부모님의 과거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아, 나는 정말 나쁜 자식이었구나.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평생 빨치산 꼬리표를 달고 살아온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장례식장에 찾아온 수많은 인물들을 마주하며, 그녀는 본인이 알고 있던 아버지부터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 속에서 잊고 살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고, 평생을 거리감을 두고 살았던 아버지를 진정으로 받아들인다. 이제껏 기억하던 아버지라는 한 사람의 존재가 재창조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 인간으로서 부모님의 모습을, 그들이 떠난 후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고 싶진 않았다. 아마도 그런 이야기들은 타인의 입과 머릿속에서 한 번 재확립 될 것이고, 있는 그대로 내게 전달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을 앞에 앉혀두고 노트북을 열고 그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낯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그닥 다정한 가족은 아니었다. 서로에게 최소한의 안부를 묻고 어떤 형태나 물질적으로든 마음을 표현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다정한 단어의 형태를 띄진 않았다. 그렇다고 서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분명 안다. 서로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다만 그걸 입밖으로 꺼낼 용기가 없을 뿐.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방송작가로 일할 땐 상대방을 취재하기 위해 온갖 다정한 말과 세심한 배려, 조금 과장된 웃음까지 고루 갖췄었다. 오늘 날씨가 어땠는지, 식사는 하셨는지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으로 공감해가며, 평생 부모님에게 가져보지 못한 친절을 그들에게 베풀었다. 직업이라서 가능했던 것이라고 핑계를 대보지만, 비겁한 변명일 뿐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땐 그렇게 잘했으면서 정작 부모님의 이야기는 왜 듣지 않았던 것이냐고, 매번 스스로 질책한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 아니냐며.
이제는 책을 쓴다는 좋은 핑곗거리가 있으니, 한번 쯤 부모님을 취재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게 꼭 책의 형태로 만들어질 수 없다고 해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평범한 두 사람이기에, 그들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남지 않게 될 사실이 두려웠다. 한 사람의 역사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은 무척 슬프다. 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우주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서사이 있다. 똑같은 인생은 없으므로 누구나 별나고 다르고 특별한 우주를 가지고 있을 테다. 더는 물을 수 없는 날이 되어서야 그들의 우주가 소멸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진 않다. 더는 미루지 않고, 이제는 그들에게 물어야 할 때가 왔다. 그들에게도 어린 날은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