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로운백년 Aug 31. 2023

내년에도 또 만나요, 불행한 얼굴로

영화 <꿈의 제인>

내년에도 또 만나요, 불행한 얼굴로

영화 <꿈의 제인>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랑 같이 있을 수 있는지 방법을 모르겠어요."



매번 들을 때마다, 그저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저릿한 대사가 있다. 영화 <꿈의 제인>의 주인공 소현이 꽤 아픈 얼굴로 내뱉은 말이었다. <꿈의 제인>은 누군가와 함께 하지 못한 ‘혼자’들에게, 누구든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어차피 인생은 불행하며, 드문드문 시시한 행복이 찾아오므로. 시시한 인생 혼자 살아서 뭣하겠는가, 누구든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 영화를 5~6번 가까이 보면서, 매번 소현이 대사를 내뱉을 때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누가 쳐다보는 것도 아닌데 고개를 숙였다. 표정을 감춰야 했다. 들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출처 : 다음 영화



얼마 전 나도 H에게 비슷한 류의 말을 꽤 아프게 고백했었다. 다른 작가님들과 오래 작업한 책의 펀딩이 시작되며, 나는 너무도 기뻤었다. 글을 쓰겠다고 퇴사까지 해놓고, 도무지 손에 잡힐 만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아 조급하던 참이었다. 혼자만의 작업물은 아니었지만, 드디어 내 이름이 적힌 책의 발간을 목전에 둔 상태였다. 아마 어릴 적부터 평생을 꿈꿔온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벅찬 감정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었다. 나도 드디어 책을 썼다고, 내가 원하던 것을 어느 정도는 이뤄냈다고. 생각보다 나도 잘 살았던 것 같다고. 스스로를 덜 미워할 수 있겠다고. 이리저리 떠들고 자랑하고, 오늘만큼은 나의 날인 것처럼 견뎌내지도 못할 축하를 듬뿍 받고 싶었다. 하지만 연락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불쑥 연락해서, 나 책이 나와,라고 아무렇지 않게 연락할 만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퇴사부터 집필 과정의 전반을 모두 옆에서 지켜본 H 외에는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H에게 너무 과분한 축하를 받았지만, 때론 밀도보다 절대적인 양이나 크기에 마음이 움직이는 날이 있다. H는 유독 외로운 날 위해 무수한 축하를 보내줬다. 그 마음이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출처 : 다음 영화



외로운 삶을 자처하며 살았었다. ‘어차피 세상은 혼자’라는 말이 있듯이, 나도 그렇게 살았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언제부터 그랬는지 몰라도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곁에 사람이 없던 건 아니었다. 어느 시기든 함께 시간을 지나온 이들이 있었다. 지금은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언제나 차갑게 살아온 건 아니었다. 나는 다만 무언가를 지속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관계를 맺고 계속해서 이어 나가는 것을 하지 못했다. 


그러기로 작정하고 멀어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차마 중심으로 파고드는 게 어려웠을 뿐, 언제나 사람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 세상에서 나를 기억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는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나의 부재가 어떻게든 누군가에게든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길 바랐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소현의 말처럼,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랑 같이 있을 수 있을지 몰랐다. 


흐릿한 기억에, 나는 18살에도 당시 친했던 친구에게 비슷한 고민을 털어놓은 적 있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사람들이 날 귀찮게 생각할 것 같고, 아무도 날 기억하고 떠올리지 않을 것 같아서 두렵다고. 그 나이의 나는, 지금의 나이가 되면 이런 고민쯤은 하지 않고 살 줄 알았을 텐데 말이다.



출처 : 다음 영화


                    

내게 관계나 인연은 모두 한시적인 것이었다. 마치 영원을 약속할 것처럼 더없이 마음이 깊어졌다가도,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금세 식었다. 연기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사라지는 연기를 보며 손을 뻗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등을 돌리는 쪽이었다. 사라지는 연기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들키지 않길 바랐다. 혼자 질척거리고 미련 가지고, 끝난 관계에 연연하는 못난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속으로는 누구보다 후회하고, 애타게 잡고 싶었지만, 나는 매번 표정을 감췄다. 마음을 속으로 삼켜냈다. 드러내면 약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이미 약한 사람이었다. 스스로 너무도 잘 알았다. 그래서 더더욱 약한 모습을 들켜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마 내가 강한 사람이었다면, 더욱더 쉽게 약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을까. 단 한 번도 강한 마음으로 살아보지 못해서, 그랬다면 어땠을까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지나간 인연에 연연하고 질척거리고, 우리 얼굴 좀 보자고 아무렇지 않게 매달리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감정 그대로 뱉고 표현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출처 : 다음 영화


<꿈의 제인>에서 제인은 이야기한다. 어차피 불행은 지속되는 것이라고. 인생은 불행의 연속이라고. 다만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 날이 아주 드문드문 있는 것이라고. 그럼 된 거라고. 하지만 제인은 끝까지 함께 살아 있기를 다짐한다.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자고. 내년, 내후년에도 불행한 얼굴로 함께 만나자고. 불행한 인생 중 함께 단 하루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자고 이야기한다. 나에게 필요한 건 딱 제인 정도의 위로였다. 어차피 인생을 단숨에 행복으로 바꿀 수 없다. 인생은 그리 녹록지 않을뿐더러, 행복이 주어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마치 별똥별을 볼 확률과도 같은 것이니까. 다만 드문드문 찾아오는 행복을 만끽하며, 사람들과 살아가면 된다고.


한동안 사람이 없는 것에 익숙했다. 아무렇지 않았다. 너무 별일 없이 살아서 사람들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숱한 격려와 축하가 필요한 순간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드문드문 찾아오는 행복 앞에서, 제인처럼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사람들이 없음에. 어떻게 찾아온 행복인데, 얼마 만에 찾아온 평화인데. 함께 누릴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외로웠다. 그렇지만 어차피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제인이 그랬던 것처럼 외로움은 평생 지속될 테다. 나는 제인처럼 사랑받기 위해 누군가에게 애정과 마음을 쏟는 쪽이었으니, 사람들은 계속해서 내 옆을 떠나갈지도 모를 일이다. 여전히 소현처럼 외치고 싶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 곁에 있을 수 있는지 방법을 모르겠다고. 그래서 난 너무나 외롭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