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주망태 Apr 17. 2024

나의 음주 철학

이 아직 없지만 급하게 만들어 본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독하게도 많은 술을 마시면서 내가 지켜왔던 한 가지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술에 기대지 말자’였다. 술을 마시는 그 자체에 즐거움을 둘 뿐 그것에 기대서 그다음의 무언가를 계획하거나 기대하지 말 것. 예를 들어 술을 마시고 용기를 내서 마음속에 있던 말을 고백한다거나, 술을 마시고 취한 기분에 글을 쓰거나 일을 하지 말자는 것이 내 고집이었다. 그래서 안 좋은 일이 있거나 기분이 처질 때는 특히 술을 마시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때야말로 다른 어떤 때보다 술에 기대서 힘든 일을 잊어버리거나 기분이 좋아지길, 혹은 아예 일을 망쳐버리길 바라기 쉬우므로.


  "어떻게 해야 술을 끊을 수 있죠?”

  금주 비법을 묻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나 역시 그런 게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번 생각해 보게 됐다. 그리고 어렴풋이 얻은 첫 번째 비결이 바로 술에 기대지 않는 마음이었다. 술에 기대서해왔던 일들이 많다면 술 없이는 그다음 일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 테니까. 술 취한 기분에 기대 잠들었던 사람이라면 술을 마시지 않고 잠자는 일이 쉽지 않게 되어버릴 수도 있다. 만약 무엇인가를 술의 힘을 빌려 하고 있다면, 먼저 그 둘의 관계를 끊어내는 일이 우선이다. 술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다른 모든 일에서 벗어나 왕좌에 오를 만한 자격이 있다.


  술 자체를 즐긴다는 음주철학은 다른 영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술을 무기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는 행위는 폭력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예의 운운하면서 내 잔에 술을 따라주기를, 잔에 담긴 술을 한 번에 마시기를, 술 마실 때 고개를 돌려 마시는 등의 어떤 행동을 바라지 않는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 술값의 1/n을 지불하게 하지 않는다. 술과 붙어있는 많은 것들을 끊어내고 그저 술 자체를 마시는 공간과 시간을 즐긴다. 거기에 누군가 함께해 준다면 그 사람들을 마땅히 존중한다.




  이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되고 보니 기존의 자가 철학들을 정반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는 기회도 생겼다. 나와 어울리는 사람들 역시 비슷한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어서인지 다행히도 아직은 술을 마시지 않는 행위에 대해 비난이나 공격을, 강요를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기쁘게 술자리에 참석한다. 술을 따라주길 바라는 사람에게 술을 따라준다. 술값의 1/n을 지불하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술 마시는 사람들 앞에서 금주한다고 떠벌리지 않는다. 


  술 마시는 사람들을 마땅히 존중한다.

  그것이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여전한 음주 철학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만큼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존중받을만하다. 어떤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든 그것은 순전히 내 선택일 뿐, 무엇보다 즐겁게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동행한 사람들에게 금주를 권하지 않는다. 예전의 내가 반주 한 잔을 곁들였을 메뉴 조합이라면 술을 함께 주문할까 묻는다. “소주 한 병 더”를 외치고 싶은 친구가 내 눈치를 보지 않게 한다. 배가 불러도 술 마시는 사람을 위해 안주를 넉넉하게 주문한다.


  옛말에 술도 마셔본 놈이 안다고, 누구보다 술을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이 모든 일들이 여전히, 마찬가지로 즐겁다. 다시는 술을 안 마실 거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살면서 어떻게 술을 한 모금도 안 마실 수 있겠어요?”

  나는 대답한다. 아직도 소중하게 가지고 있는 술이 참 많은데, 언젠가 정말 기분 좋은 날에 좋은 자리에서 한 잔쯤은 마실 수 있지 않을까? 그때를 생각하면 못내 웃음이 나오는 나는, 아직도 여전한 주당이다.

이전 06화 술을 끊었다는 고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