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고 말하고 싶은 그날의 기억
사는 건 때로 그렇다.
만개한 벚꽃 아래를 걸으며 행복에 젖어있다가 누군가 치우지 않은 개똥을 밟는 일처럼, 대체로 고요하고 평화롭지만 뜻밖에 만난 고난은 신발 밑창 무늬를 파고든 그것처럼 끈질기고 냄새난다. 오늘 신호 잘 받네 하고 신나게 운전했다가 며칠 후 기억나지도 않는 차선 위반 딱지를 받는 것, 감기에 걸려 일주일 만에 몸무게 3킬로그램이 빠졌다가 3일 만에 다시 5킬로그램이 찌는 일. 예상 가능하지만 예상할 수 없고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큰 사건, 우리 선조들은 이런 일을 일컫어 이렇게 말했다.
“에라이.”
여러 사람과 술을 마시는 일도 마찬가지다. 약속을 잡고 만날 장소를 탐색하면서 입맛을 다신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가 있으면 채 만나기 전부터 반갑고, 누군가가 연인과 헤어졌다거나 일자리를 옮겼다거나 하는 떡밥들이 있으면 기대감이 더욱 높아진다. 그저 그날 하루는 즐거울 거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종종 ‘에라이’ 같은 일들이 벌어지곤 하니 인생은 더욱 아이러니.
그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그렇게 서두르지 않는 건데!
평소 느긋한 성향인데도 그날은 왠지 조급증이 나서 발을 동동 구르게 됐다. 외국에 갔다가 귀국하는 길이었는데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이 통신망에 연결되지 않아 한참을 고생했다. 인천공항의 통신사 부스에서 시간을 너무 오래 보낸 탓에 약속 장소까지 가는 길이 더 급해졌다. 계획대로라면 2시간 먼저 도착해서 한숨 돌리고 친구들을 만날 생각이었는데, 약속 시간에 딱 맞게 도착해 버렸다. 그래도 늦지는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 달 만에 보는 친구들과 냉삼집에서 만났다. 친구 하나가 전담해서 고기를 구워준 덕에 여느 때보다 편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소주는 한라산 오리지널로 골랐다. 알싸하게 위를 훑고 내려가는 25도 소주의 맛을 나는 좋아했다. 배가 좀 차면 내가 친구를 위해 고기를 구워줄 생각으로 부지런히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셨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그게 문제였다. 아니, 그날의 모든 일들이 문제였다. 전날 짐 싸느라 잠을 두 시간밖에 못 잤고 새벽에 일어나 바쁘게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잠깐 눈을 붙인 것 외에는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기내식 먹을 입맛도 아니어서 하루종일 먹은 것이라고는 물 몇 잔이 다였다. 그런 상황에서 급하게 술을 마시다 보니 소주 한 병을 채 못 비우고 만취하고 말았던 것이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소주 한 병에 만취해 본 적이 없었다. 만취로 끝난 게 아니었다. 속에 있는 것을 다 게워냈고 기억도 잃었다. 술에 취해 기이한 행동을 하고 나서도 그게 너무 생생하게 기억나서 괴로운 것이 나였는데, 그날은 드문드문 플래시 터지듯 장면만이 떠돌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고 나서 처음 찾아온 감정은 공포였다. 내가 어떻게 집에 와서 누웠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친구들이랑 언제 어떻게 헤어졌는지 가물가물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라는 상황이 있다면 바로 딱 그때였다. 무엇보다 평소 주량에 한참 못 미치는 양을 마시고 이랬다는 것이 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동행했던 친구에게서 전날 내 만취 정황을 본 소감을 들었다. 그는 내가 대체로 격앙되긴 했지만 큰 실수는 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그렇게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꽤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있었던 웃지 못할 사건에 대해 말해주었다. 내가 돌연 큰 소리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커다란 어른이 밤중에 엉엉 소리를 내며 우는 모습을 상상하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큰 소리로 엉엉 우는 것이 내 만취 습관인가, 그걸 20여 년 만에 처음 알았다고 생각하며 신기하기도 무섭기도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주 좁은 인도를 걷고 있었다는데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걷던 내가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과 그만 부딪혔다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걷지는 못했겠지만 내 건장한 체격을 생각했을 때 그분에게 가해졌을 충격이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아마 그분은 놀라고 아파서 내 얼굴을 쳐다봤을 텐데, 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큰 소리로 엉엉! 울고 있었던 거다. 잠깐이지만 그분은 꽤나 당황하신 것처럼 보였고 오히려 나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서둘러 자리를 뜨셨다고 한다. 정말 죄송하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 얘기를 듣는데 웃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에라이, 이러려고 그날 냉삼이 그렇게 맛있었지. 이 날은 내가 공식적으로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 날로 기록되었다. 더불어 내가 처음으로 블랙아웃을 겪은 날,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술버릇을 처음 알게 된 날로도.
‘엉엉 울었다’라는 제목의 글을 발견한 건 그로부터 4개월 후의 일이었다. 미발표 원고를 정리하다가 그 제목이 눈에 띄었고, 지금으로부터 대략 7년 전쯤 쓴 글이었던 것이다. 글 속에서 나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화장실 갔다 오는 길에 그대로 집으로 내빼고 있었다. 한 밤 중에 아무도 없는 길을 걸으며 나는 엉엉 울었다, 고 썼다. 구구절절 이유들이 붙어있는 울음이었지만 나는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해지고 말았다. 에라이, 우는 거, 원래 내 술버릇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