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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주망태 Mar 20. 2024

술고래 엄빠는 술고래

술고래 딸도 술고래

  집안의 분위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식성이다. 신기한 것은 분위기와 식성 양쪽 모두 그 집안을 벗어난 후에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집안의 분위기를 보아야, 뭇사람들의 식성을 겪어야 내 집안 고유의 그것에 생각이 미친다. 경험의 폭을 넓혀가는 과정의 이면에는 이렇게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 역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일련의 체험을 통해 지금껏 내가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다른 렌즈를 통해 살펴보게 된다. 과연 잘 알고 있었던 게 맞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익숙한 것이 생소하다. 때로는 대 반전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나는 내 아버지의 식성이 세상에서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아버지는 대식가였다.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 대부분을 아주 많이 잡수셨다. 열무김치의 양념을 씻어내고 멸치로 국물을 내서 만든 맑은 김치찌개, 각종 푸성귀 무침, 새우젓에 매운 고추를 썰어 넣고 푹 쪄낸 새우젓찜. 주로 지방 출장을 많이 다니시던 아버지가 집에 오시던 날이면 식탁은 풍성했고 으레 그랬듯이 밥을 서너 공기씩 들이켜시는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처럼 나선 외식에서 아버지가 그 무엇도 입에 안 대시는 걸 보고 말았던 것이다. 맛있게 먹는 나와 동생에게 말없이 돼지갈비를 구워주신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급하게 밥을 찾으셨고,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아버지의 비위를 탓했다. 아버지가 참 까다로운 입맛을 가지셨고 집에서만 잘 드셨던 분이라는 걸 지금은 안다.


이케아에서 발견한 세일 중인 보드카 앱솔루트.
가구판매점에 왜 보드카가 있는지 모를 일이지만, 세일 중이라는 표시를 보고 내가 고민하자 동행한 딸은 "세일이면 무조건 사야지"라는 말을 남겼다.



  모든 어른들이 그렇게 술을 좋아하고 많은 날 술에 취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흥청망청 술에 취해 살아가던 신입생 환영회 시즌이 지나고 나니 술좋아파와 술싫어파가 극명하게 나뉘었다. 술싫어파가 더 많았고 소수의 술좋아파만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사람들이 모두 내 부모님과 친척들처럼 술을 좋아하고 가까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서서히 알게 됐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나는 술고래 집안의 맏이답게 줄곧 술을 마셔댔다. 돌아보면 술을 왜 좋아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매일 당연하게 생각하며 술을 마신 시간이었다. 매일 취했고 사고도 많이 쳤다.


  대학생이 되더니 매일 술에 절어 사는 나를 보고 부모님은 제법 놀라셨던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과 정식으로 술을 마셔본 적이 없기에 얼마의 술을 마시고 다니는지 가늠은 못하고 계셨는데, 마침 그런 기회가 왔다. 외식으로 고기를 먹으면서-그날은 아버지도 삼겹살을 많이 드셨다- 소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식사에 가볍게 곁들이기로 한 술이었는데 어느덧 빈 소주병이 10병 넘게 쌓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 모두 취했다. 사장님이 계산해 주면서 가족들이 와서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시는 건 처음 본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취해서 "우리 딸이에요, 대학생이에요, 대학생!"이라며 웃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재미있고 좋은 사람이 된다.


  그날 집에 가면서 아버지가 큰 소리로 말했다.

  "너는 우리 딸이 맞다."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잘 마셔서 가족으로 인정받았다. 술고래 집안다운 성인식이었다.

지금은 나도 부모가 되어서 술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있는 딸을 키우고 있다. 고백하자면 내가 금주 결심을 처음 밝히고 내 앞에서 "술을 그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라며 펄쩍 뛰었던 사람 역시 내 딸이었다. 술 좋아하는 엄마를 너무도 잘 알고 그런 엄마의 취향을 지극히 존중해 주는 딸은 아직도 내 금주 결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술고래 부모님에게서 나고 자란 술고래 딸인 내가 내 딸을 어떻게 키워나갈지, 또 이 친구는 어떤 어른이 될지 나도 못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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