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내가 그 액체와 처음 사랑에 빠졌던 날은 말이지
그날은 저녁 바람이 아주 선선했어. 9월이나 10월쯤, 더위가 한풀 가시고 낮에 햇볕 아래에 긴 시간 서 있으면 좀 덥지만 그늘 밑은 시원한 그런 날. 맞다, 그때는 9월 말이었어. 세기말의 추석 연휴였고 수능을 한 달 여 앞둔 나는 친구를 따라서 우리 집에서 가깝지도 않은 친구네 동네의 독서실에 가게 된 거야. 첫날은 꽤 열심히 공부를 했던 것 같은 기억인데, 그다음 날부터 망하기 시작했지. 화장실에 갔다 오니 책상 위에 파란색 캔커피와 쪽지가 놓여있었던 거야. 쪽지엔 내 친구의 글씨로 "내 친구가 주래"라고 쓰여있었지. 그래, 친구 동네 독서실이니까 당연히 같은 독서실에 다니는 동네 친구도 있었을 텐데 난 그런 생각을 못했었던 거야. 그리고 익숙한 친구들끼리 있던 독서실에 새 친구가 오면 으레 설렘 같은 게 자리 잡기도 하는 법이잖아? 그래서 마땅히 내 친구의 친구들은 나랑 같이 술이 마시고 싶게 되어버린 거야.
글쎄, 그 친구들이 불량 학생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저 친한 친구들끼리 같이 몰려다니길 좋아하고 그럴 때면 가끔 용감해지기도 하는 평범한 아이들이었던 기억인데, 어쨌든 그 친구들이 음주 경력이 있는 건 사실이었어. 나중에서야 친구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 그 친구들과 종종 동네 꼬치집에서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셨다는 거야. 내 친구는 수업시간에 좀 졸긴 했지만 나름 모범생이었고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가지고 있기도 했는데 그 고백은 정말 의외였던 기억이 나네. 어쨌든 나는 그 친구들의 음주 경력을 전혀 모른 채 그날 밤 모임에 참석하게 됐고 친구들이 가방에서 꺼낸 작고 파란 청주 병에 깜짝 놀라고 말았지.
첫 음주 2n년 후의 탄산 청주.
첫 음주의 추억을 안겨주었던 작고 파란 청주는 2n년 후 탄산 청주로 변신했다.
톡 쏘는 탄산과 향긋하고 부드러운 목 넘김이 일품이다.
사실 우리 집은 대대로 굉장히 애주가 집안이었고 나는 중학교 때부터 식사 자리에서 맥주 한 잔씩을 받아 들고 같이 건배를 하던 문화에서 자랐단 말이야. 홀짝홀짝 한 두 모금 정도 마실 줄도 알았지. 물론 요즘 같으면 부모 세트로 철창행이지만. 여하튼 그래서 그 친구들이 꺼낸 술병을 봤을 때 그리 낯설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우리는 엄연히 학생이었고 그것도 고3이었으니까 무언가 또래 친구들끼리 모여서 술을 마신다는 게 나는 굉장히 잘못된 일처럼 느껴졌던 거야. 자연스레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게 되더라고.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딱 그 상황이지.
우린 어떤 학교 운동장 스탠드 맨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밤중에 남녀 고등학생 대여섯 명 무리가 자리 잡고 술을 마시다가 누구 눈에 띄었다가는 문제아로 찍히기 딱 좋은 환경이었지. 그래도 처음 만난 친구들 사이에서 겁쟁이로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저 그들이 하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어. 종이컵에 청주를 한잔씩 따르더니 다 같이 짠하자고 하더라? 본 건 많았으니까 흉내 내는 건 어렵지 않았지. 그리고 그렇게 처음 마셨던 청주 한 모금. 생각보다 쓰지 않았고 맛있었다? 어쩜 그때 나는 주당이 되는 내 미래를 예견했는지도 몰라.
이때 학교 경비 아저씨라도 나타나주었다면 더 재미있는 기억이 되었겠지만, 아저씨도 설을 쇠러 가셨는지 학교는 고요했어. 가끔 아주 시원한 바람이 불고 눈을 감고 그 바람결을 느끼고 있으니까 어디 아주 먼 곳에 와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어. 처음 와본 장소에서 잘 모르는 친구들 사이에 있는 게 오히려 더 좋은 시간이었고, 잠시나마 수험생으로서의 스트레스도 잊어버렸던 기억. 첫 음주로 기억되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싶어. 물론 처음 취했던 날은 정말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언젠가는 떠올리게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