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주망태 Apr 10. 2024

술을 끊었다는 고백

주당에겐 당연하게도 술친구가 있다

  주당에겐 당연하게도 술친구가 있고 내 술친구들은 역시 나만큼이나 술에 진심이다. 이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서로에게 낯을 가리던 2년 정도의 비교적 긴 시간이 있었는데, 우리가 서로 주당이라는 걸 알았다면 아마도 그 시간이 2개월쯤으로 줄어들었을 거라는 농담을 하곤 한다. 함께 술을 마시면서 우리는 2년여 세월이 무색하게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이제는 낯가리던 그 시간들을 종종 안주거리로 꺼내곤 한다. 그래서 금주 결심을 하고 나서 가장 큰 숙제도 과연 이 친구들에게 어떻게 고백을 하는가였다.


  "나 술 끊었어"라는 고백 뒤에 예상되는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았다.

1. 친구들이 나에게 그런 게 어디 있냐며 배신자라고 욕한다.

2. 친구들이 나에게 그런 게 어디 있냐며 계속 술을 권한다.

3. 친구들이 나에게 그런 게 어디 있냐며 인연을 끊는다.

.

.


  그러니까 애초에 내 예상에 친구들의 기본 대답은 "그런 게 어디 있어?"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토록 술을 사랑하던 내가 어느 날 한 순간에 술을 끊으리라고는 나 조차도 예상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다 심지어 그 친구들과 여행을 가게 되면서 나는 더욱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주당들의 여행엔 술이 빠질 수 없고 결국엔 좋든 싫든 나는 그 고백을 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운명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2월의 날씨는 아직 쌀쌀해서 저녁식사에 곁들인 맥주는 자연스럽게 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늦은 밤, 호텔에서 결국 우리는 술상 앞에 둘러앉게 되었던 것이다. 이날은 친구가 특별히 준비한 일품 진로가 진상되었다. 내가 여행 때마다 들고 다니는 찻잔-겸 술잔으로 이용하곤 했다, 당연하게도-에 술을 한 잔씩 따르고 건배를 했다. 술을 마시지 않지만 술을 좋아하는 마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나는 이 증류식 소주의 향을 맡고 입술도 살짝 적셔보았다. 부드럽고 구수한 향기가 기분 좋게 코를 자극했다. 친구들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내 밑장 빼기를 눈치챈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잔을 거듭하고 건배를 계속하면서도 누구도 나에게 술을 권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참 이상했다.


친구들과의 여행에 진상된 증류식 소주. 부드럽고 구수한 향이 아름다웠다.


  평소 우리는 서로 술 따라주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고 각자 따라 마시는 편이었기 때문에 몇 잔은 피해 갈 수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렇게나 고요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는 친구들이 반응 없는 이유를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었다. 첫째, 내가 술 마시지 않는 상황을 존중해주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둘째, 일품 진로가 너무 소중해서 내가 술 마시지 않는 상황을 오히려 반기고 있다. 이 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했을 때 둘째 이유는 너무 말이 안 된다는 지적이 많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 술친구들은 그만큼 술에 진심이라는 것을.


  내 걱정이 무색하게 그 여행은 그렇게 고요히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결국 그 고백을 하고 말았는데 친구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네가???"였다. 심지어 "우리 여행 가서 같이 술 마셨잖아!"라는 말도 듣고 말았다. 그렇다, 내 술친구들은 각자 술을 마시는데 열중해서 내가 술을 마시는지 아닌지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 바탕에는 우리가 각자 알아서 술을 잘 마실 거라는 어떤 탄탄한 믿음, 깊은 신뢰 같은 게 깔려있었다. 역시 우정 중에 최고 우정은 술친구 우정(?)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다음번 술자리에서 술친구를 만났을 때에도 나는 또 한 번 "네가???"라는 말을 들었다. 이제는 술 약속에도 차를 가지고 다니는 나에게 친구들은 아직도 "술 마실 건데 차를 왜 가져왔어?" 묻는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내가 술을 끊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모양이다. 한편으로 여전히 같이 술집 투어를 다니는 내가 신기하다고 한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술자리는 즐겁고, 술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안주들도 꿀맛인데. 무엇보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 가까워진 내 술친구들이, 술을 몽땅 빼고 나서도 참 좋다. 그러니 술 약속이라면 무조건 나가고 봐야지.


  이제 나는 음료수 잔을 들고 친구들의 술잔에 건배한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다양한 안주를 주문하고 맛보길 즐긴다. 차에 친구들을 태우고 2차, 3차로 향하는 운전기사가 되기도 한다. 친구들의 배려로 2차는 술 대신 차를 마시러 갈 때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즐겁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영원히 내 술친구일 것이다. 좋은, 술친구.

이전 05화 술버릇은 없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