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주가의 데이트 코스는 언제나
20대 고주망태의 세상은 음주의 틀에 갇혀있어서, 그때는 누구를 언제 어디서 만나든 가능한 술을 마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자 직업 특성이라고 하기엔 많은 선후배 기자님들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것 같고 이제는 그런 추세도 없어졌지만, 2000년대의 20대 고주망태 기자는 심지어 일을 하면서도 취하지는 않았어도 종종 음주 상태였던 것이다. 오전 6시에 아침 당직으로 출근하자마자 철야 끝나고 퇴근하는 선배와 함께 해장국에 소주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일상이었으니까. 술이 없다면 굳이 찾지는 않아도, 술이 있는 곳이라면 그걸 절대 마다하지 않는 것이 주당의 기본자세 아닌가.
그때의 음주 몰입은 일 외의 일상생활에까지 깊게 침투해 있어서 연애를 하면서도 데이트 코스가 회식 코스와 비슷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미술관에 갔다가 -여기까지는 제법 데이트 같다- 아직 밝을 때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기 시작한다, 2차로 맥주집에 가서 골뱅이에 맥주를 마신다, 3차를 간다, 4차를 간다. 소풍을 가서 함께 싸 온 와인을 마신다, 2차로 감자탕에 소주를 마신다, 3차를 간다, 4차를 간다. 연애를 하면서도 술 덕분에 볼 꼴 못 볼 꼴을 많이 보고 보여줬다. 서로의 음주 습관과 술버릇을 아는 것은 연애하는데 꼭 필요한 정보이기 때문에 탐색을 멈출 수 없다는 주장은 아주 허울이 좋은 핑계였다.
만취 데이트의 포인트는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파트너를 얼마나 젠틀하고 편안하게 귀가시키느냐 하는 점에 달려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 자리가 없다면 기꺼이 임시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이 필요하다. 택시를 타더라도 속이 안 좋다고 하면 언제든지 차를 세울 수 있는 순발력과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면 위생봉투를 미리 마련하는 철저한 준비성이라거나. 파트너가 결국 먹은 것을 역으로 확인하는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등을 두드려줄 수 있는 비위를 갖추면 좋다. 물론 나는 귀가시키는 입장보다는 귀가 서비스를 받는 입장에 더 자주 놓였다.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이었던 기억은 와인을 왕창 마시고 보라색 토를 하는 나에게 등을 두드려주며 "자기는 토 색깔도 예쁘네"라고 말해주었던 경험이었다.
보라색 토를 칭찬해 주었던 애인은 나랑 술 마시는 걸 꽤나 즐겼었다. 연애 초반부터 술에서 술로 이어지는 데이트 코스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는 시간은 매번 즐거웠다. 가끔 나에게 백세주를 권하긴 했어도 결국 오십세주로 타협을 봤고 주량이 세진 않아도 나만큼이나 술을 즐긴다고 생각했다. 만취한 나를 젠틀하고 편안하게 귀가하게 했으며, 대환장 만취 데이트 다음날에도 술 한잔 하겠냐고 먼저 물어주는 진국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만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자연스레 알게 된 것이다. 그가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는 세상 누구보다 비위가 약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때의 충격이란..!
무엇보다 내가 놀랐던 점은 그는 나를 만나기 이전에는 어떤 데이트에서도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데이트를 회식처럼 하는 나를 보며,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와는 별개로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 데이트도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술에 푹 절여져 살던 고주망태에겐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떤 인연이 이런 알코올향 가득한 데이트에서 우리를 만나게 했던 것인지, 생각할수록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서 그 인연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 애인은 그 이후로 거의 20년이 다 돼가는 시간 동안 여전히 술을 좋아하지 않는 채로 술고래인 나를 곁에서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술을 마시지 않는 나를 종종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조금 끔찍하긴 하지만 이 에세이를 쓰면서 한 번씩 상상해보곤 한다, 술고래 짝꿍이 되어서 꼽아보는 고주망태 술주정 탑 3, 물론 10개도 거뜬히 채우겠지만, 적당히 3개 선에서 타협을 봅시다, 내가 전에 오십세주 마셔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