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지만 지금 딱 생각나는 맛술!
대학교를 다니면서 본업 외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았던 일은 여행이었다. 두 달에 가까운 방학 동안 친구들은 해외어학연수를 갔지만 나는 대신 배낭을 메고 국내 여행을 다녔다. 처음 떠났던 배낭여행은 대학교 2학년 때 1년 위 선배들과 함께한 강화도였는데, 떠올려보면 그만한 궁상이 없었고 무엇보다 가장 치욕스러운 점은 내가 최악의 빌런이었다는 거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겁이 무척 많고 운동신경은 0에 수렴해서 배낭을 메고 산을 넘어 다음 야영지로 향하는 일 자체가 엄청난 난관이었다. 올라갈 때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산을 내려오면서 발이 미끄러질 때마다 고라니 울음소리 같은 괴성을 질러댔고 옆 사람을 마구잡이로 잡아대는 바람에 같이 중심을 잃기 십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선배들은 굉장한 인내심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싶은 것이, 그렇게 울고불고하던 나에게 싫은 소리 대신 자주 쉬어가자는 말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 때문에 하산 시간은 점점 길어졌고 해는 점점 져가는데 길이 점점 좁아지더니 사람의 자취가 남아있지 않은 곳까지 와버렸다. 설상가상 전파를 찾지 못한 채 배터리만 소모하던 휴대전화는 급기야 전원이 꺼져버렸고, 마지막 전화기가 꺼지는 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려버렸던 것이다. 거짓말이 아니라 당시엔 정말로 아무도 찾지 못하는 깊은 산속에서 조난당한 채 죽어간 네 명의 대학생을 기리는 울음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듯했다고.
참다못한 선배 하나가 제발 그만 좀 하라고 했고 나는 정말 그만했다. 그와 동시에 놀랍게도 하산하는 길이 우리 눈에 띄었고 그때부터 너무 쉽게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역시 처음부터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야영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늦은 밤이었고 놀랍게도 그 야영장은 우리가 전 날 묵었고 당일 아침에 벅찬 희망을 품고 길을 나섰던 그 야영장이었다. 그러니까 처음 목표는 그 야영장을 나서서 산을 넘어 반대편 동네로 갈 생각이었는데 하루 종일 산을 헤매고 다시 출발 지점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니 당시엔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지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심정이었다.
다시 텐트를 치고 있자니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더 많이 오기 전에 식사 준비를 하자고 두 명은 김치찌개를 끓이고 나는 선배 한 명과 동네 슈퍼에 찬거리를 사러 갔다. 전 날도 꽤 늦게 야영장에 도착해서 대충 싸 온 것들로 식사를 해결했기에 슈퍼에는 처음 발을 들인 것이었다. 참치캔과 주전부리를 집어 들고 슈퍼 안을 훑어보던 우리 눈에 빨간 라벨 진로 소주가 딱 들어왔다. 소주병 뚜껑에도 스크루 방식이 도입되고 뚜껑 색도 초록색으로 바뀐 지 오래였던 2000년대 초에 구경하기 힘든 왕관형 뚜껑 소주를 거기서 만날 줄이야. 출렁이는 황금물결 라벨에 빨간색 네모, 그 안에 眞露 두 글자가 강하게 새겨진, 참이슬이 아닌 말 그대로 진로 그 자체인 옛날 소주. 강화도 구석 마을 '점빵' 같은 동네 슈퍼 진열장에 단 한 병 남아있던 구식 소주를 집어 들고 반가움과 신기함에 소리를 질러대며 텐트로 돌아왔다.
빨간 뚜껑을 병따개로 열어서 한 잔씩 따르고 건배했다. 알싸한 옛 소주 향을 맡으니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생했던 하루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텐트 밖에는 세차게 비가 내리고, 김치찌개 한 입에 소주 한 잔,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제야 선배들 얼굴을 웃으며 마주 볼 수 있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는 인사도 했던 것 같다. 아까는 너한테 진짜 짜증 났다는 고백도 들었고. 무슨 말을 들어도 웃음이 났다. 청춘의 한 장면이었다. 세상에 맛있는 술은 너무도 많지만 선물처럼 주어진 빨간 뚜껑 소주의 맛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최고의 술로 남아있다. 고생 끝에 소주 온다는 옛 성현들의 말을 다시 한번 불러와 기억에 되새기며, 그래도 고생은 되도록 적게 하는 게 좋겠지만 덕분에 소주가 더욱 맛있다면 가끔은 고생도 할 만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