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주망태 May 15. 2024

낭만 주당 연대기

주당 세계를 잠식한 주종들, 그 완만하고 때론 급박한 타임라인


  마침내 21세기가 시작되었고 그와 동시에 고주망태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니, 주종은 소주였다. 새털처럼 가벼운 주머니를 가진 대학생이 마시기에 저렴하면서 동시에 강한 취기를 전해주는 소주는 그야말로 가장 만만한 술이었으니, 풋사랑 상대로 낙점되기에 충분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는 술이 뭔지도 모른 채 그저 마시는 일에 열을 올렸던 것 같고 물론 그렇게 마시고 나서는 취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발걸음은 자연스레 술집으로 향했고, 늘 비슷한 사람들과 둘러앉아 경쟁하듯 술을 마셨다.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면서 겨우 집으로 돌아가 누웠고 대체로 밤새 숙취에 시달렸다. 아침에 기다시피 해서 겨우 학교에 갔고, 수업이 끝나면 다시 술집으로 향하는 삶이었다.


  그마저도 용돈이 떨어질 때가 되면 술집은커녕 학교 잔디밭이나 선배 자취방에 둘러앉아야만 했다. 소주에 오징어, 과자 따위를 씹으면서 "나 때는 새우깡 한 봉지를 가루 내서 숟가락에 침 묻혀서 찍어먹었어. 소주 한 잔에 두 번 찍어먹으면 선배한테 혼났어"라는 등의 썰을 들었다. 맥주는 사치이며 부르주아의 술이라고 배웠다. 오래도록 그걸 낭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사회에 나와보니 '찐어른들'은 확실히 달랐다. 선뜻 맥주를 사 마시고 배가 부르다며 안주도 남겼다. 진짜 낭만이 아닌가! 무엇보다 그 무렵부터 대한민국에 와인 열풍이 불었다. 그에 힘입어 와인과 소믈리에의 세상을 다룬 만화 『신의 물방울』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와인 교실과 동호회도 우후죽순 생겼다. 회사 동료들이 너도나도 『신의 물방울』을 사서 읽었다. 나도 질 수 없어서 『신의 물방울』1~5권 세트를 구매했다. 만화책은 잘 못 읽어서 1권을 읽다가 그만두었지만, 그저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싸'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비싼 와인을 마시면서 너도나도 각자가 가진 와인 지식을 뽐내기 바빴다. 이쯤 되면 다들 퇴근 후에  와인 대백과 같은 걸 통째로 외우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됐다. 와인에 어울리는 치즈나 마리아쥬에 대해 연구하면서 프렌치나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드나들었다. 괜찮은 와인바를 찾아 청담동과 홍대 인근을 어슬렁거렸고 좋은 집을 발견하면 또 동료나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와인잔에 담긴 카베르네 쇼비뇽을 한껏 돌려가며 밤새 공부한 와인썰을 풀었다. 때로는 동료들에게 들었던 와인썰을 다른 자리에 가서 마치 내가 원래 잘 알던 지식인양 떠들다가 밑천이 거덜 나 들통나기도 했다. 낭만이었다.

 



  와인 광풍이 지나가자 그 자리를 위스키가 차지했다. 몰트의 개념도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에 싱글몰트 위스키가 유행을 타면서 너도나도 싱글몰트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와인 대백과 대신에 위스키 대백과를 공부해야만 했다. 낭만은 힘든 것이니까. 와인 때처럼 사람들이 위스키의 계보를 읊어대기 시작했다. 다행인 것은 이렇게 유행이 변해가면서 모두들 주종을 갈아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위스키를 공부하면서도 여전히 소주를, 와인을, 맥주를 마셨다. 세상을 휘어잡는 술은 바뀌는 것이 아니라 매번 늘어나고 있었다.


  위스키에 탄산수와 다양한 향을 첨가해 마시는 하이볼도 덩달아 유행해  칵테일의 왕위를 차지했다. 팬데믹 때문에 집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너도나도 수제 하이볼을 만들어서 마시기 시작했다. 하이볼 바람은 위스키를 넘어서 보드카, 데낄라, 진과 럼 등의 다양한 리큐어를 끌어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격리 때문에 쇼핑도 쉽지 않은 시기에 크고 독한 술 한 병이면 한동안은 술 살 걱정을 안 해도 되었으니 이보다 좋을 수 있나.





  백인백색의 취향 잔치인 요즘엔 지역 전통주들이 사랑받고 있다. 여러 지역의 오랜 전통을 가진 주가들이 만들어낸 막걸리와 증류주들이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예전 유명한 전통주의 특징은 술이 고향을 떠나 멀리 여행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특히 탁주는 유통 환경도 중요해서 마시고자 하는 사람이 그 지역에 찾아가야만 맛볼 수 있었다. 안동 소주나 교동 법주, 한산 소곡주처럼 누구나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제대로 맛본 적 없는 술들도 많았다. 이런 전통주들이 곳곳에 생겨난 프리미엄 전통주 전문점을 통해 빛을 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대기업과 새로 생긴 소규모 주가들도 전통 증류방식을 이용해 다양한 전통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향을 내고 전통과 현대의 방식을 조화해 향과 맛이 좋고 건강에도 그리 나쁘지 않은 술들을 만들어냈다. 서울의 프리미엄 전통주 전문점을 통해 유통되기 시작했던 수많은 전통주들이 일반 술집과 식당에서도 팔리고 있다. 서울의 밤, 밀담, 황금보리, 여유, 미상, 해창 막걸리, 대대포, 두레앙, 서울 고량주, 바다한잔 동해소주, 안동 국화주, 도원결의, 사랑할 때, 빙탄복, 황진이... 이름을 다 열거하기도 어려운 다양한 전통주들이 여러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언제나 사랑받는 맥주나 소주는 물론이고 와인, 전통주, 다양한 리큐어까지 술이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그보다 그 술을 마주하고 앉은 사람들의 세계는 더욱 깊고 넓고 다양하다. 이제 세상의 모든 술을 한 번씩 다 맛본 것 같은 기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유행이 생겨나고 타임라인의 새로운 영역이 채워질 것이다. 앞으로 또 어떤 술이 어떤 조명을 받아 빛날지도 궁금해지는 걸 보면, 술을 마시지 않아도 나는 여전한 주당이다.

이전 09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