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물 모아 한강이 되었어요
당신이 만약 축구 국가대표로 뽑혔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뽑혔으므로, 당연히 동네방네 소문을 냈을 것이고, 조만간 자신이 설 세계적인 무대를 생각하며 환상에 젖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대회가 시작되자, 그 꿈의 무대는커녕 잔디도 밟지 못한 채 벤치에만 앉아 있다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 왜 뽑았어?”
지금, 이곳에서 겉모습은 한국인이지만 국적이 외국인인 직원과 겉과 속이 토종 한국인임이 분명한 직원이 같은 날에 입사를 해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호텔 국가대표로 뽑혔지만, 아직 후보선수에 불가했다. 그리고 곧 선발로 뽑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종 엔트리에 들기 위해서는 우대 조건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유창한 언어 능력이었다. 특급 호텔의 손님 80% 이상이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한국어보다 외국어를 더 우대하는 곳이었다. 억울했다. 한국에서 태어났고, 영어를 나름 공부한다고 했지만 외국인은 이길 수 없는 불공평한 세상.
스케줄러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외국 국적에 탄탄한 체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선수를 선발로 넣을 수밖에 없었겠지. 비실대는 외국어 실력을 갖춘 나는 만년 후보선수였다.
그나마 동기가 쉬는 날 들어갈 수 있는 대체 선수. 당연히 스케줄은 오후 오전으로 날뛰었다. 스페어의 인생이란. 내가 스페어라니.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계약직 3개월 차, 실바이 주임과의 점심 식사 시간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수연아, 너는 운이 좋았어? 그렇지?”
“네?”
“너, 생각해 봐. 우리 부서 직원들 이름이 다 영어잖아. 줄리, 스텔라, 에밀리, 에이미, 제시카 그게 다 외국에서 왔다는 증거지. 그런데 외국에도 갔다 오지 않은 너를 왜 뽑았겠어?”
“음. 토종 한국인으로서, 온몸 바쳐서 열심히 할 것 같아서?”
“뭐래? 그 새로 들어온 고 나라, 걔가 금방 그만둘까 봐. 너도 혹시나 하고 뽑은 거잖아”
“에이~ 선배 말도 안 돼. 농담하지 마세요.”
“네가 뽑힌 게 더 말이 안 되는 거야. 고나라, 걔가 얼마나 스펙이 좋아 걔가 왜 우리 부서에 왔을까? 다른 부서도 많은데…. 부서장도 뽑으면서도 불안했겠지. 얘 그만두면 우리 또 뽑아야 하는데라던가. 만약 얘를 다른 부서 뺏기면 우린 또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감이 들었겠지. 그래서 다른 부서에서 안 뺏길 안전 빵을 뽑자고 생각했겠지. 안 그래? 너 생각해 봐. 선배들이 누굴 열심히 가르쳐줘? 너야? 걔야?”
“고나라요…. 저는 그냥 멀뚱히 앉아 있는데..”
“답이 딱 나오지? 너 실전에 투입되면, 사고도 많이 칠 거야. 딱히 배운 게 없는데 다가, 주전이 안 나가면, 너는 그대로 아웃인 거지!”
“주임님은…. 왜 저에게 이런 말을 해주시는 거예요?”
“야. 나도 10년째 주임이다. 그것도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 것들에게 밀리고 밀려서 후배들은 다 진급했는데, 다람쥐 쳇바퀴처럼 늘 같은 자리지. 그래서 널 보면 마음이 짠해서 해주는 말이야. 우리가 그들보다 나은 건 눈에 서린 독기밖에 없다. 독기를 키워라! 독해져야 해. 그래야 살아남는다. 이 정글 같은 부서에서 말이야.”
“내가 스페어타이어이었다니...”
“그래, 씁쓸하겠지. 그래도 지금부터 정신 차리고 대처해. 옛 따, 기분이다. 남은 동그랑땡 너한테 줄게. 먹고 같이 힘내서 우리 무찌르자.”
실비아 주임의 말을 듣고 나니, 국가대표로 뽑혔다며 신이 났었던 어제의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며칠 안가 그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핵폭탄 급 사고를 몰고 다녔다.
사고 1.
“일본 카지노 손님이 다른 손님방으로 전화를 연결해 달라는 말을 못 알아듣고 몇 번이나 다시 물어봐 결국 당직 지배인이 그 방에 찾아가서 무릎 꿇으며 사과하게 했다.
사고 2.
초밥을 룸서비스로 시킨 손님의 주문을 잘못 듣고 사시미를 주문해 버렸다.
사고 3.
MARCH 5(3월 5일) 객실 예약한 손님의 예약을 MAY 5 (5월 5일)로 날짜를 잘못 예약해서 3월 5일 손님이 체크인할 때 예약이 없어서 스위트로 업그레이드해 줌.
그 외에 룸서비스 주문받아 놓고 안 찍기, 분실물 보내주기로 하고 깜빡해서 택배 요청 안 하기, 예약 시 객실 요금 잘못 계산해서 클럽 객실 업그레이드해 주기…. 등등 사고를 몰고 다니는 나에게 어느 날 실비아 주임은 말했다.
“수연아. 내가 예언하긴 했어도, 이건 너무 심한데?”
“죄송해요. 제가 귀신에 씐 것 같아요.”
손과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게 하는 귀신이. 사실 나에게 예약실은 사방이 지뢰밭이었다. 쉬는 날 전화받기만 하면 ‘수연아, 혹시 너 그날 기억나?’라는 소리가 들리는 지뢰들이 내 심장을 터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인사부에서 말한 예약실은 그냥 예약실이 아니었다. 전화 한 통으로 전화 연결뿐만 아니라 룸서비스, 모닝콜, 분실물 신고, 객실 예약 및 호텔 손님 요청 사항 및 항의 등 모든 걸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곳이라고 불렸다.
다른 부서에서는 예약실을 예약실이라 부르지 않았다. ‘모르면 무조건 0번 눌러서 물어봐라’고 해서 붙여진 별명. 0번 부서.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말 전화벨은 쉴 새 없이 울렸고, 정작 물어볼 사람에게 답변을 점점 못 받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엔 외향적인 성격 탓에 물어볼 것을 다 적어서 물어보던 나도 어차피 돌아오지 못하는 대답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물어보려고 기다리던 나에게 돌아오던 싸늘한 눈초리가 얼마나 무섭던지. 입을 닫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지낸 벙어리 세월 1년. 우연히 들어간 화장실에서 뜻밖에 목소리를 들었다. 내 옆에 않은 유 과장님의 목소리 었다.
“참 나라는 일 잘하는데…. 걔는 좀 아쉬워.”
다른 여자 직원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래도 어떡해요. 잘 끌고 가야지.”
“실수를 정도껏 해야지. 내가 얼마 전엔 부장님한테 물어봤다니까. 걔 그냥 자르면 안 되냐고. 그랬더니 요즘 사람 구하기 힘들다고 일 년 더 지켜보자 더라고. 자기가 같이 일해 봤냐고. 고통받는 사람은 난데 말이야.”
분명 이름을 말하진 않았지만. 내 이야기였다. 자르고 싶은 직원이라니. 내 앞에서는 웃으며 잘하고 있다고 말했던 사람이 내 뒤에서 이렇게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니. 충격과 모멸감에 자리에 한참을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알리가 없던 유 과장은 화장실을 나가면서도 끊임없이 말을 이어갔다. 얼굴은 얼마나 뚱한 지. 대답도 안 해.라고 말하는 그녀의 말은 결국 가시가 되어, 내 마음에 박혔다.
‘내 얼굴이 뭐 어때서. 우리 엄마는 너무나도 이쁘다고 했는데.’
분노가 치솟았다. 사실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당신들의 가시 돋친 말들이 찌른 목구멍에 구멍이 나서, 침들이 말라버려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가슴속으로 소리쳤다. 화장실을 떠나도 들리는 그들의 비웃음. 화장실에 숨어 있던 나는 그만 나가지도 못 한채, 주저앉고 말았다.
“역시 내가 앉아야 할 자리는 이곳 화장실 변기인 건가?”
지금 마음만 먹으면 변기 클리어링을 외칠 수 있었다. 하지만 1년을 조용히 변기에 앉아서 눈물을 몰래 훔친 시간이 아까워졌다. 부모님에게 내 입으로 내가 패배자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화장실에서 눈물만 훔치던 사람이 당신을 눈물 나게 만들겠어.’
분노는 가끔 이상한 힘을 발휘한다. 아무에게나 손가락 질을 받던 동네 똥개가 주변 사람들을 무는 미친개가 될 수 있었던 건 팔 할이 분노였다.라고 직원 시상식에서 유 과장을 째려보는 내 모습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일은 최종 보스, 일 년 더 써보자고 말했던 부서장 면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
지금은 고개 숙이지만, 당신들 생각처럼 쓰이진 않을 거야!’
어느 때보다 문이 활짝 열렸다. 나의 굳은 의지 아니 복수의 서막이 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