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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초툰 May 30. 2024

젖은 낙엽도 때론 날아갈 수 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호텔

 기분 좋았던 만남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은 목구멍에 모래알이 가득 차오른 것처럼 답답했다. 마치 다른 낙엽들은 다 날아가버리고 혼자 바닥에 눌어붙은 젖은 낙엽 같았달까? 가뜩이나 차고 시린 마음에 스치듯 부는 바람이 상처를 툭하고 건들었다. 


 공허함. 그래도 다른 동료들은 호텔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데, 나는 나사 빠진 선풍기처럼 삐걱거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처음 호텔을 그만두었을 때에는 나도 그들처럼 곧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더 가혹했다. 


 경력직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했던 타인의 차가운 시선들. '특 1급 호텔에서 7년 넘게 일했으니까, 어디든 나를 받아줄 거야!'라고 생각했던 내 기대를 산산이 무너트렸다. 마음은 점점 더 쪼그라들어 500 객실 넘지 않는 호텔을 가지 않을 거라고 굳혔던 내 결심도 어느새 300개 아니 200개 그냥 어디든 나를 받아주는 곳으로 바뀌었고, 결국 나를 이곳 명동까지 오게 만들었다. 


  명동. 외국인과 호텔의 성지. 내 다리로 걷는다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걸었던 동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어김없이 캐럴송이 울리고. 쇼핑몰 앞에 준비된 무대에 나는 곧 미래의 댄스스타라며 화려한 불빛 아래 자신의 춤 실력을 뽐내는 곳이었다. 그 활기를 쫓아 많은 특급호텔이 들어섰다.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지갑도 탈탈 털기 위해. 하지만 시간이 흘러 어느덧 화려했던 건물은 임대문의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휘청이고 있었다. 심패소생술에 실패한 듯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다.


 하지만 이 앙상한 건물마저 나를 받아줄 곳은 없었다. 앙상한 뼈들이 지탱할 수 없는 나잇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눈만 깜빡였을 뿐인데 늘어버린 주름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1차 서류 광탈. 그게 내가 맞닿드린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기에 36살 백수에게 필요한 건 뭐니 뭐니 해도 머니였다. 악착 같이 버틸 수밖에



이곳에 이사와 구직을 한지 어느덧 3개월. 몸이 기억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을지로역 초록색 1번 출구를 빠져나와, 불 꺼진 별다방을 지나 어둑 컴컴한 거리를 향했다. 지나치가는 것만으로도 술기운이 풍겨 나오는 배 나온 아저씨. 제2외국어 문제집을 들고 마지막 지하철을 타기 위해 빛의 속도로 달려가는 직장인. 골목에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나서야 문을 닫는 라멘집의 깜빡이는 불빛을 따라 우측 골목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 그냥 나는 치킨 냄새를 맡으며 걸으면 된다. 그게 내가 사는 집이니까. 1층 가득 치킨집이 몰려 있는 회색 건물. 두식이, 로봇, 장모님 치킨집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렬로 집합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골목 입구부터 치킨과 맥주향이 뒤섞인 향이 쉴 새 없이 풍겨왔다. 이 건물 3층에 올라갈 때쯤 내가 치킨이 된 건지, 아니면 맥주가 된 건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치세권'에 나는 살고 있다.


물론 자취방에서 보이는 전망 또한 훌륭했다. 사방이 적갈색 벽돌벽이 보이는 전망. 심지어 최근엔 오래된 배수관에서 터져 나온 오수로 인해 '층간 소음 플러스 무료 측간 소음'까지 풀옵션의 매물이었다. 그래서 명동에 자취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이 있는 전날에는 어김없이 경기도에 있는 본가에서 잘 수밖에 없는 나의 스위트 홈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기름에 튀긴 것 같은 찌든 냄새가 나에게 나는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내 옷에 코를 대본다. 이제는 옷에서 나는 건지 내 몸에서 나는 건지 분간할 수가 없어졌다.


 건물 입구에 다다르자, 하나밖에 없는 보석 같은 매물이라며 내 귀에 속삭이던 1층 부동산 아주머니가 보였다.  빠글거리는 아주머니의 머리가 화가 잔뜩 난 듯 더 삐쭉 서있었고,  거친 세월을 살았다는 걸 인증이라도 하듯 철 수세미처럼 거친 남자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 명동바닥의 외국인이라는 외국인을 다 휩쓸었던 호텔이었으면 뭐 해? 사스에서 메르스에 코로나까지 계속 불어대는 스트라크 직구 공에 결국 쓰려졌으면서, 할아버지가 아주 자존심은. 이런 거 부탁할 때는 커피 한 잔이라도 뽑아와야 하는 거 아냐?"


구두쇠로 유명한 아주머니가 웬일로 로봇 치킨집 앞 야외 테이블에서 연거푸 맥주를 목에 털어 넣었다. 통통한 아주머니 팔과는 다르게 뼈만 앙상 해보이는 안경재비 남편이 아주머니에게 조용히 말하라는 듯 자신의 입에 검지를 갖다 대며 속삭였다.


"여보 조심해 듣겠어!"

"들으라 그래. 맨날 저기 정문 앞에서 지키고 있으면 손님이 오냔 말이야? 차라리 나한테 저 건물을 팔라고 하면 내가 냉큼 팔아줄 텐데."


두꺼운 종이 뭉치를 부채처럼 부치고 있던 부동산 아주머니는 화가 안 풀린다는 듯 종이뭉치를 파란 플라스틱 테이블에 툭하고 던지더니 일어서서 반대편 건물을 향해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거의 망한 거나 다름없는데, 이제 와서 이런 종이 쪼가리를 돌린다고 직원이 채용되겠어? 요즘은 인터넷 세상이라고!"


펄럭! 아주머니가 파란 테이블을 들었다 올리는 바람에 뭉쳐있던 종이들이 사방에 날리기 시작했다. 종이 한 장이 때마침 부는 바람을 타고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침 더운 날씨 열기를 식히기 위해 바닥에 뿌려놓은 물에 닿아 종이들이 젖은 낙엽처럼 시멘트 바닥에 딱하니 붙었다. 물에 닿아 색이 더 화려해진 채용 공고가 내 시선을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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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클 호텔 채용공고

객실 수 : 50개 미만.

브랜드: 로컬 호텔이지만, 고유의 개성 있는 호텔만 가입 가능한 스몰 럭셔리 브랜드 클럽에 가입됨.

채용 인원 : 0명

직원 수 :10명 미만

직급 : 대리 이상

호텔 경력 :10년 이상

연봉 : 4,000만 원 이상 협의 가능

근무시간 : 10시-7시(9시간)/ 토/일 휴무 보장

직원복지: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체력 보장.

우대사항: 멀티 태스크가 가능한 인재 대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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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완전 난데? 라며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심지어 "직주근접" 집에서 걸어서 10걸음이라니. 3개월 동안 애타게 찾던 직장이었다. 그와 동시에 망한 거나 다름없다는 부동산 아주머니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말장난처럼 써 놓은 과거로 돌아건 것 같은 체력 보장이라는 문구는 미심쩍긴 했지만, 50 객실의 호텔이라는 조건을 모든 장애물을 덮어버렸다. 이보다 꿀을 빨수 있는 보직이 있을까? 결국 내가 끌어당긴 대어에 심장이 활어처럼 뛰기 시작했다. 텅 빈 사무실에 앉아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쳐다보며 웃고 있는 내 모습이 물 흐르듯이 떠올랐다. 바로 여기다는 생각에, 나는 지체할 것도 없이 젖은 바닥에 붙은 종이를 들고, 아까부터 부동산 아주머니가 삿대질을 하고 있던 호텔 정문에 서 있는 하얀 머리의 노신사를 향해 걸어갔다. 이를 아드득아드득 갈며 생각했다.


'젖은 낙엽 유라야! 이번엔 정말 전력을 다해서 젖었던 바닥에서 날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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