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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초툰 May 14. 2024

호텔이 우리에게 남긴 선물

낙지볶음의 알싸함 끝에 단맛은 인생을 닮았다.

 서둘러 나온다고 했는데도 오후 4시 50분이 되어서야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경기도민의 삶이란. 나는 고개를 들어 보쌈집 간판을 올려보았다.


"하나도 안 변했네."


 이부자네 보쌈집. 선배가 퇴사할 때, 후배에게 몰래 알려준다는 우리들의 맛집, 하지만 우리는 메인 보쌈보다는 낚지 볶음을 사랑했다. 유독 알싸하게 코를 찌르는 매운맛과 혀끝에 톡 하고 치고 가는 단맛이 호텔에서 '나도 우리 집에서는 소중한 딸'이라는 서러움을 쓸고 갔다. 거기에 소주 한잔을 추가하면, 피를 튀기며 전화를 받았던 목구멍까지도 소독되는 느낌이랄까? 아직 아무것도 입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나는 엉덩이가 더 익숙해하는 자리에 털석하고 앉아, 옛 추억의 향기를 맡는다.


"맛있는 냄새~그런데 이 언니는 왜 일찍 오라 했으면서 없네?"


나는 숙희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또 누구랑 수다 떨고 있으리라 안 봐도 그려지는 그림에 나는 익숙하게 앞치마를 목에 둘렀다. 예전에는 소주 브랜드가 찍혀있던 빨간색 앞치마가 걸려 있던 자리에 이제는 일회용 흰 부직포가 걸려 있었다.


'옛날엔 이런 거 두르지도 않았는데.'


 야속한 세월 같으니라고. 이젠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흐르는 게 더 많은지라 나는 누가 시키기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앞치마를 목에 걸고, 수저와 젓가락 세팅을 하기 시작했다. 습관이란 이렇게 무섭다. 여자 18명이 일하는 곳에 막내 생활 1년이란 시간은 나에게 젓가락 행진곡이 피아노 칠 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가르쳤다. 그렇게 수저를 놓느라 엉덩이가 정문을 향해 있었을 때, 누군가 내 엉덩이를 팡하고 쳤다. 손이 매운 걸 보니 1년 후배 미연이었다.


"역시 유라 네가 1등이구나!"

"빨리빨리 못 와? 아니 선배가 이렇게 숟가락 놓아야겠냐?"

"아이고 죄송합니다. 선배님" 


  미연은 애니콜 듀얼 폴더처럼 허리를 굽신거렸다. 마른 체형에 펄럭이는 형형색색의 꽃무늬 원피스에, 한지 얼마 안돼 보이는 뽀글거리는 갈색머리는 질끈 묶여있었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이 미연의 신발로 향했다. 호텔에 일 할 때 작은 키가 콤플렉스라며, 평생 절대 내려올 리 없다던 하이힐은 어디로 사라지고 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었기 때문에. 일 할 때는 그런 구두 신으면 허리 부러진다고 내가 그렇게 구박해도, 해맑음으로 방어하던 미연이었기 때문에 나는 대뜸 물었다.


"어이구. 미연 씨 죽어도 못 내려온다던 하이힐은 어디 가셨어요?"

"야 이제 우리 나이 36이다. 내 애가 이제 초등학생인데 편한 게 장땡이야!"

"그럼 너의 생명이라던 속눈썹은 어디 갔냐?"

"이미 뽑히고 사라진 지 오래다."


 미연은 몇 가닥 안 남은 눈썹을 내 옆에 바짝 앉아 깜빡거렸다. 낙타 눈썹 어디 갔니?라고 되물어도, 눈썹은커녕 이제 자고 일어나면 배게 자국도 사라지지 않는다며 나에게 푸념을 하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옅은 주근깨도 보였다. 미연이는 쌩얼이었다. 미연이가 쌩얼이라니! 그 시절 우리가 얼마나 보고 싶었던 그녀의 쌩얼이었던가? 


 호텔에 일 할 때는 트라이얼 스테이라고 해서 일 년에 한 번 호텔에 투숙하면서 손님이 되어서 서비스를 평가하는 날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 부서엔 다른 부서에는 없는 히든 미션이 있었다. 바로 정 미연의 쌩얼 사진 찍기. 찍기만 한다면 스위트를 팔아야 가능했던 4시간 얼리 퇴근도 가능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의 쌩얼을 찍을 수 없었다. 너무나 철두철미 했기에, 누구보다 잠이 없었기 때문에 숱하게 극악스러운 난이도 때문에 나 포함 많은 후배들이 좌절했다. 하지만 이젠 이렇게 대놓고 쌩얼이라니. 미연은 이젠 포기했다며,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자신의 눈가의 자글이를 가리켰다. 우리는 서로 약속이나 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때, 숙희 언니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들어왔다. 비 맞은 생쥐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더 재밌는 타깃으로 공격 전환을 했다. 


"숙희 언니! 왜 전화를 안 받아!"

"전화했었어? 나 여기 광화문에서부터 동대문까지 걸어서 오느라 못 들었다."

숙희 언니는 뿌듯한 듯 우리에게 2만 보가 찍혀 있는 어플을 보여줬다. 

"운동을 한다고? 언니가?"


 나와 미연은 놀라서 숙희 언니의 얼굴을 쳐다봤다. 숙희언니는 '뛰지 마라 걸어도 닿을 수 있으니, 걷지 마라 우리는 의자를 끌고 갈 수 있으니'라는 의자보행을 우리 부서에서 유행시킨 장본인이었다. 의자의 네 바퀴를 세븐의 롤러스케이트처럼 현란하게 여기저기를 타고 다닌 우리 부서의 전설의 숙븐. 그런데 그런 그녀가 운동을 한다니.


"왜 그렇게 놀래? 야! 이제 언니 나이도 마흔이다. 모든 해야지 않겠냐? 시집가려면?"

"그럼 가야지 언니. 만나는 사람 있어?"


미연은 맞다며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입을 쌜쭉 내밀며 말했다


"언니가 있겠냐? 빈 수레가 요란하다더니 그렇게 호텔에서 남자라면 그렇게 다 퍼주더니, 막냉이 정이도 시집갔는데 이제 어쩔 거야?"

"아니! 이년이... 너는 늘 내가 말하지만, 싸가지가 없어. 네가 후배여서 다행이지 선배였다면 아휴. 미연아 참 네가 불쌍하다 나는..."

"뭐래?"

"그러니까요! 히히힛"


우리는 음식은 시키지도 않고 그렇게 서로 디스 삼매경에 빠졌다. 그런 우리가 익숙하다는 듯 나미는 오자마자 주문표를 들었다.


"다들 오랜만이에요~2년 만인가? 낙지볶음 3인분에 보쌈 2인분 맞죠? 아참 공깃밥은 몇 개 시킬까요?"


우리는 질세라, 서로 시켜달라고 손을 든다. 나미는 익숙한 훈련사처럼 우리를 부드럽게 조련했다. 

"공깃밥 4개! 오케이! "


짧은 단발머리의 나미는 익숙한 듯 메뉴판에 표시한 뒤 종업원에 건네고 냉장고에서 아무렇지 않게 맥주 두병을 꺼냈다.


“이모 맥주 두 병 꺼내요!”

“그래”


 나미의 모든 동작이 마치 몸에 밴 익숙한 동작처럼 자연스러웠다. 민망해진 숙희언니는 괜스레 나에게 화를 냈다.


"유라 너 이년! 네가 언니 오기 전에 다 세팅해 놨어야지. 나미는 임산분데... 아이고 임산부 앞에서 욕이라니 미안하다. 나미야! 혹시 네 뱃속의 아이 귀가 생겼니?"


 나미는 괜찮다며 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자리에 앉는다. 나는 이모가 돼서 한심하다며 혀를 강하게 찼다. 그 모습에 숙희 언니는 노발대발하며 이년 저년을 찾다가 나미와 눈을 마주치자 '앗' 하며 입을 가렸다. 그 모습에 앉아있던 우리 모두 빵 하고 웃음이 터졌다. 


 민망함에 귀까지 빨개진 숙희언니. 항상 우리보다 어른 같았던 나미.  친절함의 끝판왕이었던 미연,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고 유명했던 미친개 그리고 늘 마지막에 등장하는 정이까지 저 멀리서 뛰어오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꽃들이 뿜어내는 홀씨들이 우리를 반기듯이 식당 안까지 들어와 일렁이고 있었다. 분명 시간이 지나 우리의 겉모습은 변해 있었지만, 우리는 예전 그대로였다. 어쩌면 그때 전부인 줄 알았던 호텔이 우리에게 남겨준 선물인 것 같았다. 질질 짜며 울다가 웃었던 옛 동료. 유정이는 저 멀리에서 늦어서 죄송하다는 듯 두 손을 모았다.

 

미연이는 천천히 오라며 친절하게 유정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나미는 아무렇지 않게 냉장고를 열어 맥주 한 병을 꺼냈다. 숙희언니는 걸었던 게 힘들었는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웃음이 삐져나왔다.


'오늘은 또 어떤 추억이 우리를 울고, 웃음 짓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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