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과거로 돌아가게 만드는 옛 동료
바닥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에 낮잠에서 깼다. 내가 어떻게 감은 눈인데, 며칠 동안 나를 스토커처럼 쫓아오던 불면증을 피해 겨우 든 잠이었다. 깊은 분노가 단전에서 끓어 올라왔다. '이번엔 정말 못 참아!' 얼마 전 천장 누수로 툭하면 들리는 소음이라는 생각에 가뜩이나 작은 눈을, 위층을 향해 레이저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소리가 울리는 방향은 그쪽이 아니었다. 내 옆에서 엎어져 있는 핸드폰이 요란하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죄송한데, 위층이 아니라 저예요.'
순간 핸드폰을 켜진 불빛을 마주치자마자 작은 가슴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인생이란 알 수 없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특급 호텔에서 하루에 1,000콜이 넘는 전화를 미친 듯이 받던 매니저가, 이젠 핸드폰이 번쩍거리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란다는 사실을. 벨 소리만 들어도 소스라쳐서 자존심 상하게 진동모드라니.
슬쩍 실눈을 뜨고 본 핸드폰에 찍힌 번호는 등록도 되지 않은 전화번호였다. 무시할까? 몇 번이나 질끈 눈을 감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았지만, 핸드폰은 내가 보고도 모른 척하는 이 상황이 불쾌한 듯 더 심하게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순간 아래층에서 불쾌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쾅쾅쾅, 웬만하면 위층! 전화 좀 받지요?"
젠장, 아래층 남자가 버럭 하며 주먹으로 천장을 치는 소리가 내 작은 방안에 울려 퍼진다. 천장 누수로 방음이 되지 않는 게 우리 집뿐만이 아니었다니, 여전히 번쩍이며 전화 받으라는 핸드폰을 조심히 들어 올린다. 개미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 보세요?"
"어디냐?"
누구냐고 묻지 않을 필요도 없는 익숙한 목소리. 무려 5년 동안 한 방에서 들었던 숙희 언니의 목소리였다. 이게 몇 년 만에 전화 통화인가? 하지만 전혀 어색함은 없었다.
"어디긴 어디야? 집이지!"
나는 숙희 언니다라고 마음속으로 외치자, 온몸에 흘렀던 식은땀이 다시 모공 속으로 쏙 들어갔다. 잔뜩 올라갔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핸드폰의 진동을 타고 쪼개기 시작했던 긴장감이라는 비트도 멈추었다.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 모습을 눈에 그리듯 그리는 숙희 언니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당장 튀어나와. 언니는 이미 광화문이다!"
역시 숙희 언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는 되지도 않은 반항을 해본다.
"튀어나오긴 내가 감. 튀야? 지금이 몇 신데?... 오후 1시? 우리 약속 오후 5시잖아!"
미친 실행력을 가진 언니. 오후 5시 약속인데, 1시부터 약속 장소에 나가 있다니. 5시까지 그냥 거기서 기다리라고 하고 전화를 자연스럽게 끊긴 했지만 자연스럽게 주섬주섬 허물처럼 받아 있던 옷을 다시 집어 입고 있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숙희 언니. 뭐야 나한테 모닝콜을 한 건가? 그것도 4시간 전에? 웃음이 예고도 없이 삐져나왔다. 갑자기 떠오른 옛 기억 때문에.
숙희 언니. 나보다 4개월 먼저 입사했다는 이유로, 내 빨간펜 선생님이 되었던 선배였다. 얼굴은 태닝을 하지도 않았는데, 구릿빛에 이국적인 외모로 인도에 여행 갔다가 가는 곳마다 현지인이 힌디어를 써서 당황했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다니는 뻔뻔한 캐릭터에 처음 만나는 누구라도 금방 친해지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성격도 선배라는 완장을 차게 되자, 누구보다 차가운 빨간펜 선생님이 되었다.
"야! 예약 누가 이따위로 넣으래? 미스터랑 미시즈도 구분 안 하냐?"
숙희 언니는 가차 없이 내 예약 시트에 빨간펜을 그었다. 26살 되어서 받은 점수가 아직도 0점이라니. 수치심이 올라왔다. 나 역시 마음속에서 숙희언니 얼굴에 가차 없이 빨간색을 그었다. 그랬던 숙희 언니와 친해진 건, 공포의 모닝콜 때문이었다. 당시 직원의 잘못으로 손님이 제시간에 깨어나지 못한다면, 직원이 손님의 비행기 삯을 내야 한다고 들었던 터라 신입에게 너무나 무서운 모닝콜이었다.
특히 내가 일했던 호텔은 손님에게 기계가 아닌 친근한 사람의 목소리로 손님들을 깨워야 했기 때문에 단체로 투숙하는 손님들에게도 전화를 직접 걸어 모닝콜을 걸곤 했다.
"안녕하십니까? OOO 고객님, 6시 모닝콜입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왜 그렇게 6시 모닝콜이 많았는지, 손님이 알 리가 없겠지만 우리는 아침 조와 야간 조 할 것 없이 모두 전화기에 붙어 5시 56분부터 모닝콜을 걸기 시작했다. 30 객실이 넘는 그 모닝콜들을. 그때 숙희 언니의 촌철살인이 들렸다.
"야! 솔직히 이렇게 전화 돌릴 거면 기계가 더 친절하겠다! 안 그러냐?"
사람보다 기계가 더 친절하겠다니, 그렇게 솔직한 숙희언니의 말 한방에, 그 자리에 있었던 직원들 모두 모닝콜을 돌려야 함을 잊고 실성한 듯 웃고 말았다. 모닝콜을 할 객실 번호를 누르면서, 부은 손가락처럼 가득 부풀었던 불평을 한방에 팡 터트리는 듯한 시원한 대사에 나는 곧 우리가 친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예감이 현실이 되었다. 나는 새벽 2시에 모닝콜을 신청하는 외국인 손님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모닝콜 시트를 보니 이미 그는 체크인할 때 오전 6시에 모닝콜을 신청한 손님이었다. 다시 나는 2시에 한 번 6시에 한 번이 맞냐고 되물었고, 그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후우~아니 6시에 신청은 했는데, 만약 너희 호텔에 괜찮은 마사지가 있으면 받으려고, 새벽 2시에 일어나 보려고. 혹시 너희 호텔에 왜 그런 마사지 있니? 후우~"
변태처럼 숨 가쁜 목소리. 느낌이 왔다. 이 변태 XX. 나는 딱 잘라 그런 마사지는 없다고 말하고 그럼 2시 모닝콜은 필요 없겠다며 횡설수설하며 전화를 서둘러 끊었다.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가 마치 내가 성희롱을 당한 것처럼 불쾌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고장 난 신호등처럼 번쩍거리는 느낌이었다. 내 옆에 앉아 있었던 숙희언니가 그 전화를 듣고 있었는지 대뜸 무슨 전화냐고 물었다.
"아니 웬 변태가 전화해서 왜 성적인 마사지 있냐고 묻잖아요.!"
"그래서? 얼마 준다는데?"
"네? 안 물어봤는데요?"
"왜 얼마나 줄 수 있는지 물어보지. 다음엔 그 방에서 전화 오면 나 바꿔줘. 내가 올라간다고 하게! 하하하"
불쾌한 상황도 유쾌하게 넘어가는 그런 재치와 함께 다시 그 방에서 전화 온다면 꺼려질 나를 위해 대신 받는다고 돌려 말하는 숙희 언니에게 왠지 모를 인간미가 느껴졌다. 모닝콜 신청 때문에 급속도로 친해진 언니였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오후 5시 약속에 오후 1시 모닝콜을 하다니. 시간도 절묘하게 4시간 차이. 이런 우연이 있을까? 웃고 있는데 메시지 창이 울렸다.
"야! 너 언니가 핸드폰 번호 바뀌었다고 문자 보낸 지가 언젠데. 저장 안 했냐? 확 마! 빨리 튀어와. 외로워"
장황하게 말했어도 외롭다는 말만 들으면 된다. 예나 지금이나. 보통 때라면 문을 열고 밖에 나가기 전까지 나갈까 말까를 고민하는 나를 서둘러 옷을 입게 했다. 어떻게 변했을까? 전에 만났을 때가 2년 전인데, 예전 모습 그대로일까? 나는 무릎이 나온 츄리닝 바지에 때가 탄 운동화를 대충 구겨 신고 밖을 나간다. 겉치레가 굳이 필요 없는 모임. 썬그림 하나 발라도 립글로스 하나 칠해도 꾸미고 왔다고 바로 삿대질할 사람들. 나는 그런 옛 동료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금요일마다 연재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