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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초툰 May 24. 2024

만약에 우리가 다시 일한다면 어떨까?

일은 힘들어도 재밌겠지

"아 죄송해요 언니들, 나오는 길에 이상한 진상 전화받아가지고 달래고 오느라."


 정이의 그 말에 우리는 작은 참새의 날갯짓을 보듯,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숙희 언니가 먼저 운을 떼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정이야. 대학 졸업한다고 언니들이 쌈짓돈을 모아 만년필을 사준게 엊그제 같은데...."


이에 질세라 나도 한 마디 거들었다.


"네가 손님을 달랜다고? 에이~전화만 받으면 집에 간다고 우는 너를 달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아 선배님들! 저도 이제 고객 서비스를 책임지는 부서를 특급 호텔 유 정 매니저라고요. 매니져라고 불러주세요~"


  자신도 이제는 사람들이 지나가면 날아가는 참새가 아니라 오히려 눈을 부라리며 그냥 지나가지?라고 되묻는 비둘기쯤 되었다며 투덜댔다. 미연이는 그런 정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하지만 나에겐 아직 정이는 작은 참새 같았다. 처음에 정이를 보았을 때처럼. 아직도 어제일처럼 기억이 난다. 신입이라며 문을 열고 들어온 아이는 150cm 겨우 넘는 작은 키에, 작은 코를 받침대 삼아 올라가 있는 두꺼운 안경은 연신 내려와 정이 대신 나에게 연신 인사를 했다. 목소리는 또 어찌나 작던지. 자신이 이번에 새로 입사하는 유 정이라고 하는 말을 결국 아무도 듣지 못해, 숙희언니가 다시 되물었다.


"애기야!~ 뭐라고 했니? 크게 더 크게 말해봐 봐!"


긴장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18명의 말 많은 시누이들이 한 방에 모여 있다니. 잔뜩 주눅이 들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정이를 보며,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그녀의 퇴사를 머릿속에 그렸다.


그중에 제일 왕고 시누이인 김 과장도 그랬던 것 같다. 정이를 부르는 목소리가 얼마나 다정하던지 나는 김 과장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심지어 정이가 출근하면, 나와 내 선배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것들이 괴롭히지 않냐?'라고 연례행사로 묻곤 했는데, 아마도 김 과장 눈에는 정이가 밟으면 밟을수록 거칠게 피어나는 잡초 사이에 핀 민들레 꽃처럼, 잡초가 장난 삼아 흔들 어제 낀 바람에 홀씨가 되어 날아갈까 봐 노심초사하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그런 김 과장이 끌어당김의 효과였나? 우리 부서는 호텔 창립 이후에 처음으로 직원 만족도 조사에서 "회사 내에 친한 동료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없습니다'를 결과지를 받고 말았다. 과장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냉동고에 있던 얼음을 순식간에 제빙기처럼 갈아 마시더니, 나에게 대뜸 소리쳤다.


"야! 너 오늘부터 그 신입 유 정의 마니또니까. 그런 줄 알아."

"마니또? 그건 또 뭐야? 안돼! 나 바빠!"

"야! 걔가 직원 만족도 조사에서 친구 없다고 답하는 바람에, 방금 나 인사부에 끌려갔다 왔어. 여자만 있는 부서라서 너무 텃세 센 거 아니냐고. 이러면 내년부터는 우리 부서에 직원 안 보낸데. 뽑으면 어차피 그만두니까. 그래서 내가 내년에는 그 친구 꼭 친구 한 명은 있다고 답하게 만들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런 줄 알아."

"뭐래? 그런데 친구 없다고 한 게 유 정인 줄 어떻게 알아? 그거 비밀 아니었어?"

"야 2년 만에 들어온 신입이다. 경력 2년 미만 신입이 한 명 밖에 더 있냐? 그리고 너는 친구 많다고 했더라 양심이 있냐? 미친개가 친구가 어디 있어?"

"여보쇼. 김 과장. 양심은 언니가 없는 거 아니야? 그렇게 직원 만족도 조사 할 때만 커피 사주면서 자기를 편한 친구라고 생각하라고 할 땐 언제고? 그런데 가만... 왜 나야? 착한 미연이도 있고 어른스러운 나미도 있는데..."

"걔가 배우고 싶은 선배가 너라고 적었데, 하나에 꽂히면 미친 듯이 찾아내는 그 집념이 부럽다고 했데."

"인사부도 다 보는 데다가 아주 선배 흉을 봤구먼, 그래 감히 미친개에게 배우고 싶다고 했단 말이지?"

"야 살살해라. 또 그만 두면 안된다니까!"

"그건 마니또 마음이지!"

"우이고 저 똘아이...."


 물론 그 뒤로 정이는 자신을 쳐다보는 미친개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혹독한 겨울과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미친개가 마니또와 나눌 대화거리를 찾기 위해 퇴근 후에도 후배의 아이디로 생성된 예약 냄새를 맡아댔으니까.


다행히 정이도 새로 생긴 마니또가 마음에 든 건지, 그해 설문지에 친구 한 명 있음을 선택했다. 심지어 내가 주임으로 승진을 했을 때, 보은의 의미로 커피를 사주었다. 독기를 품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게 호텔인데 독기를 품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며. 그렇게 아무도 매니저가 될 거라고 예상했지 못했던 정이었지만, 자신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고 나미가 말했다.


"저는 정이가 매니저 될 줄 알았어요!"

나미의 말에 정이 또한 놀란 토끼 눈을 뜨며 물었다.

"네? 저요? 어떻게요?"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왜 그 프런트에서 유명한 진상 선배가 자기네 바빠서 팩스로 온 제삼자 결제 요청서 받으러 못 오니까, 지금 당장 예약실에서 직접 1층 프런트로 올라와 달라고 했나? 그랬더니 네가 그랬잖아."

"뭐랬는데요? 저 기억 안 나는데..."

"유라 선배 바꿔준다고."

"야 상상이나 했겠냐? 진상 선배의 전화를 미친 개인 유라선배한테 바꿔준다니, 나 그때 들으면서 경악했잖아. 한 바탕 난리가 나겠구나. 그런데 유라선배가 쿨하게 바꿔! 하는 거야. 그때 알았지. 쟤 의외로 강단 있다라고."

 "아! 기억나요! 사실은 아무리 진상선배라도 미친개에게 물리고 싶지 않은 건 똑같더라고요. 제가 퇴근할 때마다 힘들지? 라며 저를 많이 위로해 주셨거든요. 자기도 많이 당해봐서 안다고."


어라? 듣고 보니 내 흉이네? 이것들이 어디서 선배를 앞에서 멕이냐며 나는 예전처럼 이를 내어 보였지만, 위협은커녕, 잦은 치실질로 인해 벌어진 이 사이로 찬 바람만 휑하니 불뿐이었다. 숙희 언니는 그런 나를 보며 한마디 거들었다.


"거봐. 이제 세월 앞에 장사 없다. 미친개였던 얘도 이빨 빠진 호랑이 됐잖아. 나도 요새 나이 들어서 호텔 방 팔기 더럽게 힘들다. 말도 잘 안 들리고 얘들이 뭐 하라고 하면 세월아 네월아. 요즘은 열심히 일하라고 하면 뭐라고 하는지 아냐?"

특급호텔에서 세일즈 부서에 팀장으로 일하는 숙희언니는 한숨만 나온다며 요즘 근황을 털어놓는다.

"뭐라고 하는데?"

내가 되물었다.

"열심히 왜 해야 하냐고 되물어! 어차피 나오는 월급 똑같은데."

"그렇긴 하네."


 사실 나 또한 정이를 물어뜯어가며, 굳이 알려줄 의무는 없었다. 어차피 월급은 때가 되면 나오니까. 하지만 그때는 뭐랄까? 그 사무실 안에 세상이 우리에겐 전부였고, 후배가 욕먹는 게 내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는 것과 같았다. 혹여나 너네 후배 일 잘하더라고 칭찬을 듣기라도 한다면 프린세스 메이커의 만족스러운 결말을 보는 엄마미소를 짓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때는 우리는 왜 그렇게 열심히 일 했을까?"

나미가 낚지 볶음을 입에 한가득 욱여넣으며 대답했다.

"그냥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열심히 했던 게 아닐까요?"

숙희 언니는 조금 남은 맥주를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은 재미가 없어. 내가 출근하잖아? 그럼 직원들이 서로 무슨 이야기하고 있었는지 홍해 갈라지듯이 길이 생긴다니까?"

"예전에 열심히 일하든 아니든 결국 결말은 꼰대인가?"


  씁쓸하게 뱉는 미연이의 말에 우리는 누구도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떨구었다. 지금 우리라.. 치실 때문에 헐렁이는 이에 바람이 들어오는 미친개, 다른 호텔에 간 단체 손님을 빼오려고 경쟁호텔 로비에 서성이는 숙희언니, 3개 국어를 유창하게 했던 미연은 그게 뭐였더라?를 남발하고 있었고, 알코올 러버인 나미는 연년생 출생으로 마시지 못하는 술을 보며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다. 손님들이 욕을 하면 화장실로 달려가 울던 정이는 이제는 숙희언니보다 더 거친 욕설이 뱉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숙희언니가 엄지 척을 올려 보였다.


한 부서의 든든한 허리였던 우리가 이제 꼰대라니. 씁쓸한 표정을 삼키며 내가 물었다.


"만약에... 꼰대 5명이 모여서 다시 같이 일한다면 어떨까?"


그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떨구었던 고개를 들었다. 아마도 모두가 한마음이었으랴. 끝없이 투닥거리는 숙희언니와 나 그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동료 셋. 그때 전화벨이 울리면 서로 전화받겠다고 싸우고 결국 손님에게 욕을 뒤집어쓴 한 명이 전화 응대를 마치고 전화는 전화일 뿐이라며 껄껄껄 웃는 모습들 말이다. 어떨까? 우리가 다시 뭉친다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 잔상들이 그들과 헤어진 후에도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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