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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초툰 May 31. 2024

시간을 거스르는 호텔

황금열쇠가 아니고 황금 모래시계 라니...

 하얗게 센 장발 머리에 검은색 정장이 어울리는 노신사가 거의 쓰러져가 보이는 회색 건물 정문 앞에 서 있는 그림자가 내 발끝에 닿았다. 부동산 아주머니의 험담과 달라서였을까? 눈앞에 마주친 노신사의 아우라가 잠시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의 검은 양복에는 주름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빳빳해 보였고, 그의 양쪽 어깨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것처럼 빛나는 '황금 모래시계 배지'가 빛나고 있었다. 

'뭐야! 황금 열쇠가 아니라? 모래시계?'

다소 당황스러운 배지의 모양에 나는 그의 옷깃을 바짝 들여다보았고, 노신사는 그런 내 모습에 당황하기는커녕, 재밌는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다시 자세히 봐도 황금 열쇠는 분명 아니었다.


'그래! 이런 곳에 황금열쇠라니, 말도 안 되지!'


 황금열쇠. 무엇이든 열 수 있는 열쇠라는 뜻으로 불어로 '라끌레도어'라고 불린다. 세계에서 인정받는 컨시어즈 모임의 이름인데, 가입하면 배지를 받게 된다. 자격조건만 일단 호텔 경력 5년 이상이고 매년 난도가 높은 시험을 통과해야 해서, 전국에 몇 안 되는 사람만 받을 수 있는 영광의 훈장이었다. 그런데 저 쓰러져 가는 건물에 직원이 황금열쇠를?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순간 황금 열쇠인 줄 알았네요."라며 어깨를 풀썩하고 내려놓자, 노신사는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정중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내 귀를 스쳤다.


"아! 이건 말이에요. 불어로 시블리에 도어라고 불려요. 한국말로 황금 모래시계."

"황금 열쇠는 들어봤어도, 황금 모래시계는....."

"그런가요? 그럴 수도. 이건 알려지지 않은 모임이니까요. 아주 특별한 사람들만 가입할 수 있는."

"그래요? 제가 보기엔 그냥 짭 같은데요?"


순간 나는 마모된 자존감으로 인해 한 동안 튕겨 보지 못하고 누르기만 했던 스프링롤을 두둑 툭하고 튕겨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럴 때면 숙희 언니가 '엠블란스 부르게 하는 년'이라며 뒷목을 잡곤 했는데,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노발대발 소리를 지르는 숙휘언니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콧웃음이 삐져나왔다. 노신사는 그런 내 모습이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제 소개가 늦었네요. 안녕하세요? 저는 미라클 호텔의 총지배인 션이라고 합니다."

"네? 총지배인님이요? 안녕하세요 저는 한유라라고 합니다."


총지배인 션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딱딱하게 그의 손에 박힌 굳은살이 먼저 내 손에 닿았다. 그리고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수족냉증인가? 그를 올려보았다가 은색 명찰에 박혀있는 G.M이라는 타이틀에 놀라 뒷걸음 질 치고 말았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저 문 앞을 지키는 직원이 총지배인이라니.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못 하는 나를 위로하듯이 그는 내 어깨를 툭툭 치고는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며 방긋 웃어주었다.


"그래도 짭이라니! 듣는 황금 모래시계가 서운해하겠어요. 유라 씨."


 션은 자신의 검은 깃을 잡고 나에게 흔들어 보였다. 순간이었지만, 그의 옷깃에 걸린 모래시계 안에 모래알갱이들 멈춰 있는 게 아닌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말 실수에 헛것까지 보이나? 민망함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총지배인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머리보다 입이 앞서는 사람이라서."


 면접의 완성은 첫인상인데, 딱 봐도 최악의 첫인상. 면접 결과는 안 봐도 불합격. 편하게 '직주근접'으로 일하려고 했던 나에게 그건 안돼지라며 쾅하고 도깨비방망이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션은 혼자서 자책하듯이 머리를 조아리는 나를 보고 재밌다는 듯 한참을 웃고 나서야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재밌겠네요. 머리보다 입이 앞서는 사람과 일하면 말이에요. 우리는 호텔에 오래 있어서 그런가 입보단 머리가 앞서거든요. 뭐만 하려고 하면 이놈의 할망구, 할아방구들이 다 안된다고 하니 할 수가 있겠어요?"


할머니? 할아방구들이라고? 그럼 나이가 나는 나의 동료가 될 뻔했던 사람들의 나이가 문뜩 궁금해져서 물었다.


"다들 직원분들이 연세가 있으시나 봐요?"

"글쎄요. 있다고 해야 하나, 아님 아직 팔팔하다고 해야 하나요? 유라 씨 그거 아세요? 시간이라는 게 참 오묘해요. 삶에서 잠깐 걸어 나가다면 죽음이 맞닿아있고, 과거에서 한 걸음만 가면 현재가 되어 있죠. 과거에는 화려했던 이 건물도 지금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죽어버렸어요. 시간에 갇혀버린 거죠. 이 멈추어버린 모래시계처럼 말이에요."


갇혀버렸다고? 이해되지 않는 말들만 늘어놓는 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불 꺼진 미라클 호텔을 올려보고 있었다. 눈빛은 한없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한평생 그와 함께 했었던 사람이 사라진 것처럼, 그의 손은 옆에 나란히 서 있는 건물의 기둥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의 표정에서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 맞닿아 있다는 말이 새삼 나에게 와닿았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또 입이 툭하고 말을 뱉었다.


"과거와 현재만 붙어 있는 게 아니라 미래도 붙어있잖아요. 현재에서 한 걸음 나아가면 미래가 되듯이, 그렇게 조금씩 바꿔나가면 안 될까요?"

"멈춘 과거의 모습으로 현재를 바꾸고 그 현재가 미래를 바꾼다.... 라."


총지배인 션은 내가 그냥 뱉은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동상처럼 곧게 뻗어있던 두 발을 갑자기 교차해서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내 코앞에 바짝 서더니, 내 두 손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그래요! 바로 그거예요! 어쩌면... 당신이 적임자일 수도 있겠어요."


적임자? 무슨? 션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의 눈빛이 아까와는 다르게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모습에 나는 어릴 때 엄마가 나만 보면 수 없이 하던 잔소리가 머리를 스쳤다.


"아랫동네에 그 용하다던 무당이 항상 유라 너만 보면 하던 말이 있었어. 항상 입조심하라고! 가벼운 주둥이질로 언젠간 망신살을 뻗칠 운명이라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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