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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초툰 Jun 07. 2024

식지 않은 티백이 되고 싶었을 뿐

죽은 호텔이 다시 태어나다

 총지배인 션의 안내에 따라나선 미라클 호텔 내부는 건물 외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건물이 죽은 것 같이 조용했던 외부와 다르게 트로피칼 색의 벽지와 1층을 텅 비어 있는 로비를 지나갈 때 어디선가 들리는 웃음소리가 너울거렸다. 심지어 그가 총지배인실이라고 안내한 곳조차 권위적임을 상징하는 외딴 사무실이 아니라, 1층 로비 끝에 있는 직원 휴게소이라고 적혀 있는 허름한 방이었다.


 내 눈에 먼저 통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온통 벽지는 백지처럼 하얗고, 그 방에 색이 담겨 있는 물건은 따뜻한 물을 끓이기 위한 검은 전기포트와 형형색색의 빛깔을 띠고 있는 여러 종류의 티백이었다.


 우롱차, 생강차, 돼지감자 차, 쑥차, 녹차 등. 커피가 아니고 차라니, 직원들의 연령대가 다소 의심스러워졌다. 그런 내 미묘한 표정 변화를 눈치챈 건지, 션은 자연스럽게 선반 아래 서랍에서 부족한 티백을 채우면서 한마디 했다.


"이런, 돼지감자 차가 생각보다 빨리 떨어졌네요. '내 몸이 약이다'라는 채널에서 그렇게 혈당 수치 정상화에 돼지감자가 좋다고 했다더니, 저도 다음에는 방송에 제보를 해야겠어요. 쑥차의 효능에 대해서 방송 좀 해달라고요. 이렇게 쑥차만 안 드시니... 쓰읍."

"직원분들이 커피가 아니라 차를 좋아하시나 보네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젊을 때는 그렇게 코히하면서 좋아하시더니, 다시 젊어져도 입맛은 그대로인가 봐요."


다시 젊어졌다고?


 총지배인 션의 말은 도통 알 수 없는 말 투성이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서 있자, 그는 내게 앉으라고 동그란 모양의 테이블로 나를 안내했다. 그러더니 티백 박스에서 쑥차 티백을 두 개를 꺼내, 입구를 찢고, 자연스럽게 종이컵에 각각에 걸쳐 놓았다. 전기포트는 언제 버튼을 눌렀는지, 보글보글 물이 끓고 있었다.

너무 자연스러운 그의 몸짓에 넋을 놓고 보다가, 아차.

나는 쑥차는 별로라고 말하는 걸 놓쳐버렸다. 젠장 여지없이 쑥차 재고처리 반 당첨.  안타까운 마음에 아랫입술을 깨물자, 션은 종이컵을 내 앞에 놓으며 말을 걸었다.  


"이곳은 뭐랄까? 신비로운 곳이죠. 처음에 저도 이곳에 왔을 때는 이런 곳이 있나 싶었으니까요."

"그렇긴 하네요. 안과 밖이 너무 다른 느낌이에요."

"안과 밖뿐일까요? 후흣"


그는 알 수 없는 웃음소리를 내며 전기포트에 끓은 물을 종이컵에 천천히 부었다. 뜨거운 물이 닿자 쑥차는 자신이 숨기고 있었던 본연의 색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이 녹색으로 점점 변해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션이 말을 시작했다.


"유라 씨는 어떨 때 살아있다고 느끼세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이것도 면접에 필요한 질문인가? 싶어 한번 떠올려봤다. 내가 살아있다고 느낄 때라...


"글쎄요. 그건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누군가 나를 불러줄 때 아닐까요?“

"그럼 만약에 아무도 불러주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어떨까요?"

"글쎄요.. 아마도 더 이상 내가 필요 없는 건가?라고 느껴지지 않을까요? 그건 갑자기 왜요?"

"이 호텔이 그랬으니까요. 화려하게 빛나고 유명한 사람들이 찾아주던 때가 있었죠. 심지어 택시기사에게 미라클 호텔이요!라고 말하면 주소를 찍지 않고 바로 찾아올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요?"

"빛나던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버린 거죠. 바로 옆에 호텔들이 경쟁하듯이 들어섰고, 비슷한 이름의 모텔까지 등장했어요. 미라아클, 미라엔 클럽 셀 수 없었죠.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 잊히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호텔이 된 거죠. 죽은 호텔처럼. 마치 아무도 꺼내지 않는 이 쑥차처럼 말이에요."


션이 분명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 하얀 김을 모락모락 뿜어내던 쑥차는 어느새 어떠한 김을 뿜어내지 못하는 종이컵 위에서 자신 안에 모든 것을 짜내고 남은 티백만이 시체처럼 둥둥 떠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 시체만 남은 티백이 지금의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다. 순간 소름이 끼쳐서 가로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누구나 그렇잖아요. 주어진 시간은 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거죠. 그런데 이 건물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한번의 기회가 주어진 거죠."

"기회요?"

"다시 살 기회요. 사실 이 호텔의 건물주가 오피스텔이나 상가건물로 바꾸려고 호텔을 폐업 신청까지 한 상태였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정부 정책이 발표된 거예요. 다시 명동에 관광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폐업 위기에 놓인 호텔에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말이에요."

"그래서 직원을 다시 뽑으시는 건가요?"

총지배인 션은 내 질문에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네.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이 왠지 모를 불안함은 뭐지? 다시 물어보려는 찰나에 션은 서둘러 나를 호텔 밖으로 안내했며 말했다.


"내일부터 나오시면 됩니다. 오전 9시에 호텔 1층 로비에서 만나죠."


 내일 오면 미라클 호텔의 핵심 부서를 소개해주겠다며, 서둘러 나를 내보내는 그의 모습에, 과거에 알고 지내던 지배인이 떠올랐다.


 호텔에서 미스터 신이라고 불리던 사나이.


 소띠에다가 한참 소가 풀을 뜯어먹는 오후 3시에 태어나 일복을 손에 쥐고 태어난 사람. 나와 같은 사주. 그래서 프런트에서는 항상 예약실에서 내 스케줄을 확인한 뒤, 그의 스케줄을 짜곤 했는데 일복 많은 이가 더 많은 이의 기운을 상쇄한다는 이유였다. 대체로 효과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프런트에 들릴 때마다 미스터 신을 마주칠 기회가 많았는데, 그의 행동에서 보이는 공통점이 있었다. 프런트에서 컴플레인하는 손님에게 처음에는 다 들어줄 것처럼. '네... 네.. 그렇다고 볼 수 있죠.'라고 대충 얼버부린 후, 아무도 없는 비즈니스 센터로 손님을 안내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가 어떤 대화를 손님과 한 건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만난 손님들의 예약엔 늘 서비스코드가 남겨져 있었다. 무료 와인, 무료 스위트 업그레이드, 무료 체크아웃 연장. 유료인 호텔을 무료로 만들어버리는 서비스의 신. 그래서 우리는 그를 미스터 신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미스터 신과 같은 뉘앙스의 총지배인의 대사에 어쩌면 나도 모르게 제공될 무료 서비스에 대해서 상상하게 되었다.


'이러다간 서비스로 총지배인까지 업그레이드되겠어!'


옛 동료들과 술도 한잔 하기도 했고, 꿈에만 그리던 취업에 나는 집까지 어떻게 돌아온 건지 또렷이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한 건, 술을 마시고 있던 부동산 아주머니는 치킨집 앞에 더 이상 보이지 않았으며, 꿈을 꾼 것 같은 몽롱한 기분에 잠이 들었다는 것뿐이었다. 다음날, 다시 눈을 떴을 땐 어제일이 꿈이었는지 현실인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을 때 그건 현실이었다는 듯 채용합격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미라클 호텔에 채용되신 걸 환영합니다.

6월 4일 오전 9시까지 미라클 호텔 정문에서 뵙겠습니다.

다시 한번 저희 미라클 호텔의 가족이 되신 것을 축하드리며, 약속된 시간에 뵙겠습니다.

총지배인 션


 총지배인이 인사부 채용 문자까지 보낸다고? 모든 게 의아했지만 첫 출근에 대한 설렘. 그리고 지옥철을 타지 않아도 되는 코 앞에 신의 직장에 대한 행복감에 젖어 나는 기분 좋게 미라클 호텔을 향했다. 밤 사이에 내린 여우비가 여름에 싱그럽게 물든 초록빛 위에 맺혀 반짝였다. 기분 좋은 첫 출근의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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