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약속
12월에는 갑자기 생긴 약속으로 정신이 없다. 12월 달력에 채워지는 일정에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과거의 나에게 저주를 보냈다. 낯가리는 주제에 낮에 사람들을 감히 만날 생각을 하다니. 일정표를 멍하니 바라본다. 오늘은 전 직장동료과 약속이다. 김포에서 코엑스까지 가야 하는 일정이었다. 한 시간 사십 분 동안 전철에 실려 가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약속이 5시 30분이니까 적어도 2시간 전에 집을 나가야 했다. 집에 나가는 순간 기차 여행으로 바뀌는 여정. 벌써 한숨이 마중 나온다.
뭉그적 이불에서 빠져나와 가방을 싼다. 갈 때 목마를 수 있으니 물병과 졸릴 수 있으니 커피를 담은 텀블러를 담고, 전철에서 읽을 책을 담으니 가방이 기분이 안 좋아졌는지 추욱하고 늘어졌다. 네 맘이 내 맘인 것을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늘어난 뜨개 가방을 바라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배에게 문자를 보낸다.
"시카 선배, 오늘 만나는 거 맞죠?"
같이 만나기로 한 티나가 대신 대답한다.
"맞죠? 맞죠? 코엑시 5시 30분."
선배는 분명 문자를 읽었다. 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내 눈에는 선배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문자를 보고 알게 된 약속. 분명 다른 날짜인 줄 알았는데, 오늘이라니. 내가 회사 앞으로 오라고 했는데 취소할 수도 없다. 저번 주였던 약속을 미뤘으니. 에잇 모르겠다.
선배에게 답이 온다.
"아... 그럼 당연히 알고 있지. 언니가 회사 일이 많아서 오늘은 조금 늦을 것 같아 너네들끼리 놀고 있어. 그리고 언니가 바빠서 한 시간밖에 못 있을 것 같아. 미안."
역시 생각한 대로였다. 허를 찌른 상대가 뱉을 수밖에 없는 말. 채팅창을 보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곳엔 변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거짓말을 하면 항상 두 귀가 빨개지는 사람이. 그 모습을 떠올리니 가기 싫었던 마음이 가고 싶은 마음으로 바뀐다. 분명 시간이 없다고 투덜대다가 오히려 가려는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겠지. 상상만으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리고 다음날 시카 언니는 일어나서 어제 늦게까지 놀았던 과거의 자신에게 거친 욕을 뱉겠지. 갑자기그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보고 싶어진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것처럼.
나는 서둘러 늘어진 가방을 들었다. 바깥에 나가니 벌써 겨울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코끝을 얼리는 것 같다. 하지만 날이 추워도 마음은 따뜻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은 바람을 타고 걷는 듯 가벼웠다. 가벼운 발걸음 때문인지, 약속 시간에 한 시간 먼저 도착하고 말았다.
코엑스는 이미 크리스마스 그 자체였다. 트리 앞에서 사진을 찍는 다정한 연인, 별마당에서 신기한 듯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어린이, 책을 고르는 노부부까지. 코엑스는 이미 크리스마스 단장을 마친 듯 흥겹게 노래를 하고 있었다. 나 역시 트리에 달린 빨간 오너먼트볼이 되어 흔들거렸다.
빵냄새에 홀려 들어가 선물을 샀다. 에그 타르트, 3개에 11,500원. 세 봉지.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이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갔다. 마치 과거로 돌아가듯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온기 때문인지 나는 시카언니와 티나와 같이 치열하게 싸우면서 일했던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의 온기가 가득했던 그 시절로. 멀리서 티나가 늦었다며 뛰어온다. 그녀의 양손에 우리를 위한 선물이 들려 있다.
순간, 나는 티나가 과거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홍대에서 술을 먹기로 약속하고 늦는 후배. 심지어 홍대에 살면서 늦는다며 타박하던 기억이. 나는 다시 미친개가 된다. 으르렁 소리를 내며 티나에게 소리친다.
"야, 빨리 와. 어디 선배를 기다리게 해?"
"아이고 선배님, 죄송합니다."
티나는 그때의 티나처럼 허리를 접은 채로 나에게 걸어온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장면처럼.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깔깔 대는 웃는다. 설명하지 않아도 몇 번이나 돌려본 영화처럼.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티나 역시 팔짱을 나에게 끼며 재잘 된다. 우리는 그렇게 만나 호랑이 선배를 만나러 간다. 비유하자면 게임 속 빌런. 끝판왕을. 얄밉지만 밉지는 않은. 서울에 자가 없고 구리에서 사는 김 차장을.
벌써부터 멀리서 호통 소리가 들린다.
"씨뱅이들 빨리 와."
늦는다면서 제일 먼저 앉아 있는 선배를 보며 또 우리는 까르르 웃는다. 우리가 같이 과거로 돌아간다. 12월이 우리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