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뒤틀림의 시작
"하늘 씨 일어나요 큰일 났어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든 그림자 "하늘"을 깨운 건 다급한 김 대표의 목소리였다.
매번 차분하게 말하던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그의 눈은 불안한 듯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여.. 긴.. 무.. 무슨 일로?"
하늘은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비비며 일어났다. 그런 "하늘"을 흔들며 김 대표가 말했다.
"그림자가... 그림자 하나가 달아났어요."
"네? 그게 무슨..."
"어제 주인이 사고를 당해서 갑자기 기억을 지워야 하는 그림자가 있어요. 그런데 그 그림자가 기억을 지우기 위해 거울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거울이 깨져버렸어요. 그리고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 그림자가 도망갔어요?"
"네..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어요."
"실이 보고 찾으라고 하면 되잖아요"
"실이도... 찾을 수 없어요. 그림자 주인이 죽어서 인연이 끈이 끊어져버리면 그림자에게 나는 주인의 냄새도 감쪽같이 사라지거든요.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방법은.."
그림자"하늘"은 조용히 김 대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하늘"을 빤히 쳐다보며 김 대표는 말했다.
"당신밖에 없어요"
"네?"
"바로 당신이 그 도망친 그림자의 덫이 되는 거죠. 당신을 찾아오게 만드는 거죠"
그 말을 하는 김 대표는 눈을 번쩍이며 그림자 "하늘"을 향해 손가락으로 총 쏘는 것 같은 동작을 취했다.
그림자 "하늘"은 갑자기 이건 무슨 황당한 상황이냐는 듯이 김 대표를 쳐다보며
"저요? 제가 덫이라고요?"
"맞아요 그림자보다 더 어두운 인간인 당신! 당신이 이곳에 오기 전에 그림자 세상에 추천을 받았다고 했잖아요. 기억나요?"
"아.. 그건 어머니 때문에.."
"아니에요 사실 상당수의 그림자들이 당신을 추천했어요. 인간인데 그림자보다 더 어두운 인간이 있다고
그 인간을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하면서 말이에요."
"네??"
김 대표는 조용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인간 세계가 코로나로 '잠시 멈추게 되자' 우울증에 걸린 그림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저는 그 당시에는 이 모든 일이 거울에 생긴 틈 때문에 생긴 일 있은 줄 알았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급하게 그림자들을 모아 심리 상담을 하기 시작했죠. 어떻게든 그 균열들을 막아보려고 말이에요. 그런데 우울증 상담 리스트에 있던 그림자들 중 몇 명이 갑자기 증상이 호전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들을 찾아서 이유를 물어봤는데 한결같이 같은 이름이 나왔어요."늘"이라는 인간의 이름을 말이죠. 그들의 말에 의하면 그 사람을 쳐다보기만 해도 심리 상담가 오은영 박사님 급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했어요."
"왜죠?"
"그림자인 자신들보다 인간인 당신이 더 불행해 보였다고 하더라고요. 초점을 잃은 채 매일 가만히 동굴로 들어가는 듯한 당신의 모습이 그림자인 자신보다 더 불행해 보여서 위로가 되었데요."
"그게 무슨..."
"그림자들은 단순하거든요. 저희 그림자들은 태어나면서 9라는 운명의 숫자를 갖고 태어나죠. 그래서 그림자 세상에 관련된 모든 숫자에 9가 들어가요 9-B라던지, 저희 전화번호가 999인 이유죠. 9는 거의 완성에 가까운 숫자지만 1이 없으면 영원히 두 자리 수가 될 수 없죠. 그래서 그림자들은 항상 숫자 1인 주인을 사랑하면서도 시기해요. 자기라면 이렇게 할 텐데 항상 숫자 1의 의견을 따라야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라고 할까? 그리고 그 불만들이 쌓았다가 인간의 아홉수일 때마다 저주를 걸어요. 돼지의 해 소의 해처럼 인간이 아홉수가 되는 해는 그림자의 해여서 그림자의 힘이 강해지거든요. 물론 주인에게 불만이 없는 그림자도 있지만 보통은 9년 치를 불만을 쌓아서 심통을 부려요."
"그런데 자신보다 더 불행해 보이는 인간을 본 거네요?"
"맞아요. 자신보다 나은 인생을 살거라고 생각한 인간이 더 불행해 보이자, 그 모습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위로가 된 거예요. 그림자보다 못한 저런 인생이 있구나 하면서 말이죠"
"그게 덫을 놓는다는 게 무슨..."
"제가 이곳에 소문을 내는 거죠. 당신의 소문은 익히 들었으니까 어느 날 그림자보다 더 어두운 인간 "늘"에게 말을 걸었더니 대화를 했다는 소문 말이죠. 그들이 늘 부르는 그 노래처럼 완전 그림자가 인간의 몸을 차지해 버렸다고."
"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통한다고요?"
"당연하죠 그림자들에게 인간과의 대화는 사막에서 보이는 신기루 같은 거예요. 이뤄지지 않을 걸 알지만 정말 간절히 바라죠. 그래서 당신이 다시 데려온 그림자들도 그렇게 인간의 몸을 차지하기 원하는 거예요. 적어도 자신의 주인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요. 더군다나 그 도망친 그림자는 자신의 주인과 이루지 못한 일이 있다고 했어요. 분명 당신을 찾아올 거예요."
"그럼 제가 뭘 어떻게.."
"인간세상으로 가서 인간 "늘"이 되어 그 사라진 그림자를 기다려요. 당신을 분명 찾아갈 거예요."
김 대표의 이야기를 들은 그림자"하늘"은 다시 며칠이 될지 몇 달이 될지 모르는 긴 기간 동안 인간"늘"로 살아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숨이 턱 하고 차오르고 답답한 느낌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지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전 자신의 주인을 잃은 그림자 실이의 슬픈 눈을 보았기 때문에 김대표의 제안 또한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또한 인간세상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주연도 다시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김 대표에게 그렇게 한다고 대답했다. 다시 인간 "늘"로 돌아가기 위해 그림자 세상 입주 센터 입구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얼마나 오랜만에 온 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인간"늘"은 주연의 오피스텔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갔다. 집에 들어오니 눈에 들어오는 건 예전 주연과 같이 살던 집 같지 않은 이질적인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밤 11시 30에 멈춰버린 시계
식탁 위에 어지럽게 놓여 있는 빚 독촉 고지서들
며칠 째 세탁을 하지 않은 것 옷들이 널브러져 있는 거실
물을 주지 않아 이미 죽어 버린 화분들
그렇게 "늘"은 발 디딜 곳 없는 곳에서 겨우 틈을 찾아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거실은 낮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불빛 들어오지 못하게 암막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검은색 이불을 두르고 있는 검은색 물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주연.. 주연? 나야.. 늘.."
"...."
검은색 물체는 미동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이불을 덮은 채 있었다.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든 "늘"은 그 물체를 향해 조용히 걸어가면서 주연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
같은 듯 다른 두 가지 목소리가 이불속에서 들려왔다.
하나는 분명 주연의 목소리였는데, 다른 하나의 목소리는 유리를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오지 마!(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늘이라고? 웃기지 마(웃기지 마) 내 동생은 죽었어! 죽었다고!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어어)!"
"그게.. 무슨..."
이불속에 검은색 물체가 반짝이더니 열려있는 창문을 향해 뛰쳐나갔다.
잠깐 스쳐본 그 주연의 모습은 예전에 인간"늘"이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온몸이 하얀색 물질로 가득 덮여 있었다.
"설마 말도 안 돼. 김 대표가 말한 그림자가 인간의 몸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주연의 생일이 지난 오늘이 주연이 아홉수가 되는 해였다.
김 대표가 말한 그림자의 힘이 강해지는 해
열린 창문에 불어오는 바람이 더 세차게 인간"늘"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