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아파트로 이사하는 날이었다.
남매의 여름 방학식 날이기도 했다.
당시 혜옥씨는 몇 주 전부터 시아버지의 병 수발을 들고 있었다. 시집살이 한번 없었고 잔소리 한번 없었던 시아버지는 일 년에 한 번 예고 없이 올라왔다. 과자 봉지를 내밀고 들어 와 사는 집을 슬쩍 둘러보았다. 딸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넘버 원”이라고 말하곤 했다.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고는 사라지곤 했다.
위암 말기 판정을 내린 병원에서는 퇴원을 권했다. 요양병원이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절, 서울 둘째 아들 집과 인천 셋째 아들 갑천씨의 집에서 번갈아 아버지를 간호했다. 모든 장기가 으깨고 으스러져 위액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며느리 혜옥씨는 시장에서 천 기저귀를 사다가 시아버지의 기저귀를 갈고 빨았다. 아들 갑천씨는 여전히 새벽에 집을 나왔고 밤에 들어갔다.
혜옥씨 혼자서 이삿짐을 쌌다.
이삿날만 아버지를 형님댁에 모시고, 이사하고 나면 방 한 칸을 내어드리기로 약속했다. 갑천씨는 그날도 새벽에 나왔다가 일찍 와 이삿짐을 실었다. 큰 트럭 동료를 섭외해 함께 이삿짐을 실었다. 저녁 늦게 대강 마무리가 되었다.
이사를 도우러 왔던 조카가 늦은 밤 다시 찾아왔다. 전화도 연결하기 전이라 서울 집에 닿자마자 소식을 알리러 도로 내려왔다고 했다. 아버지가 죽었다고 했다. 말기 암의 아버지는 약속을 지킬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셋째 아들 집이 편하다고 했던, 갑천씨를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줄 몰랐던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갑천씨는 오열했다. 평생 부모 도움 없이 고아처럼 살았던 갑천씨는 이제 정말 고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