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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대로되는사람 Oct 21. 2021

헤어짐을 목적으로 하는
자식에 대한 엄마의 사랑

  탯줄을 자르는 순간 아이는 엄마로부터 독립된 인간이 된다. 그것은 엄마와 아이의 사랑과 정을 끊는 일이 아니라, 아이에 대한 진짜 사랑을 보여주며, 뜨거운 보살핌이 시작되는 출발을 알리는 시작이다. 아이가 자랄 때도 마찬가지다. 한 인간으로 독립된 존재가 되어 세상 속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부모는 아이의 손을 적당한 시기마다 놓아주어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모든 과정과 순간들이 어쩌면 이런 날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 아닐까?


 그런데 나를 포함한 세상의 많은 부모들은 아이를 끊임없이 통제하고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두려고 한다.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이런 마음으로 애지중지 키우게 된다. 머릿속으로는 독립적으로, 자립심을 길러주며 키워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세상이 무서워서, 아직 너무 어려서,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을까 봐, 부모인 나보다 더 좋은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등 참으로 여러 가지 이유들로 겨우 놓으려 했던 아이의 손을 다시 꽉 잡게 된다. 그렇게 아이에 대한 엄마의 걱정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수없이 많은 감정의 끈들을 적절히 조절하지 못할 때가 많다. 아이는 독립적인 존재로서 독립된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알지만, 아이가 자기만의 색깔로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갈 기회를 주어야 함을 잘 알지만, 그것을 빼앗고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할 때가 많다. 아니, 애써 외면할 때가 많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걱정이 마치 세상 모든 부모들의 숙명이라도 되는 듯 정말 내려놓을 수도, 내려놓아지지도 않는다. 내 아이에게 어떤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된 마음에 발을 동동거리고 가슴을 졸이게 된다. 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봐주는 것이 아이를 위해 좋다는 것을,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참으로 쉽지 않다. 나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아이가 어릴 때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가슴속 동요 정도는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었다. ‘내 새끼는 내가 알아서 키운다.’ 하는 배짱 두둑해 보이는, 마치 대단한 소신을 지키며 교육하는 교육철학이라도 있는 듯, 무한한 사랑을 퍼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 세상과 마주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자 아이를 부여잡고 있던 엄마의 손을, 엄마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 아이의 손을 어떻게 떼어내어야 할지가 또 다른 과제였다. 그리고 그 과제가 어찌나 어렵던지, 얼마나 가슴을 아프게 하던지 웃는 날보다 울어야 하는 날들이 더 많았다. 그동안 엄마가 붙잡고 제때, 제대로 된 방법으로 놓아주지 못해 옴짝달싹 못했을 아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것으로 인해 아이가 치러내야 하는 대가도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처음 유치원에서 적응 문제로 고생하는 아이를 바라보는 것은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이었다. 양보와 배려, 규칙, 정확한 의사전달과 감정 전달 훈련 등이 주된 교육이며 놀이 활동으로 이어지는 그곳에서 마냥 자유로웠던 아이는 규칙과 통제에 많이 힘들어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기분 좋은 아침을 만들어 등원시켜도 아이는 늘 어두운 표정, 지친 얼굴로 엄마를 맞이했다. 한동안 아이의 유치원 적응이 나에겐 큰 숙제였고, 아픔이었고, 가르침과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자식의 마음에 먹구름이 끼면 부모의 마음에는 소나기가 내린다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이었다. 아이의 하루 생활, 기분에 따라 아이의 마음에 먹구름이 잔뜩 낀 날에는 엄마 마음엔 소나기가 내리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에는 엄마 마음에도 세상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를 얻어놓은 것처럼 따뜻한 봄날이 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으로 겪어내야 하는 변화무쌍한 마음의 날씨는 엄마와 아이를 그렇게 성장시키고 있었다. 스스로 일어나서 옷을 챙겨 입고, 아무리 시간이 많이 걸려도 혼자서 밥을 먹고 양치를 하고, 벗어놓은 옷 정리와 신발정리 등을 시작으로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도록 했다. 혼자서 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 엄마가 없는 곳에서도 잘할 수 있다고 다독이며 아이의 홀로서기를 준비했다. 이때 지켰던 두 가지는 아이와 규칙을 함께 정할 것, 정한 규칙을 어겼을 땐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는 새로운 규칙 속에서 처음에는 많이 힘들어하고 혼란스러워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편안해졌다. 더 많은 기회들을 가질 수 있게 되어 아이 스스로 자유롭고 만족해하는 것이 보였다. 일주일 동안 잘 지켜졌을 때 오는 보상과 성취감만으로도 아이는 크게 성장해가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지나친 사랑은 아이를 나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수많은 육아서들은 언제나 아이에게 엄마가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부모의 따뜻한 배려와 믿음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읽으면서 나는 늘 이런 말들에 크게 공감했지만, 내 아이에게 나는 과연 그런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할 때면 늘 자신이 없었다. ‘아이가 높이 날 수 있도록 엄마라는 새장에 가둬두어서는 안 된다.’ ‘부모가 아이 앞에 펼쳐진 온갖 풍랑을 막아 줄 수는 없다.’ ‘호랑이로 낳아서 개로 키우지 않으려면 아이의 손을 놓아라.’ 육아서를 통해 이런 말들을 수없이 보고, 듣지만 엄마 마음은 또 갈대처럼 흔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엄마인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자식은 헤어짐을 목적으로 하는 부모의 사랑 속에서 더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다.”라고. “엄마라는 울타리를 벗어났을 때 가장 반짝이는 별이 될 수 있다.”라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이의 준비물부터 숙제, 가방정리, 씻고, 먹고, 입는 모든 것들에 잔소리를 하고 있는 엄마다. 아직도 아이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엄마다. 외동인 아이 하나를 준비시켜 등교시키는 아침이 왜 이렇게 분주한 지... 아이가 빠져나간 집안은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아이가 벗어 놓은 옷부터 빠져나간 이브자리까지 정리를 하고 나면(나름 아이가 정리를 했다지만 엄마 눈에는 성에 차지 않는다. 늘 엄마는 이게 문제다.) 아이가 돌아와 먹을 간식과 하교 후 아이와 함께 할 활동들을 또 점검하고 출근 준비까지 해야 되니 마음은 이미 내 마음이 아니다. 정신도 이미 내 정신줄이 아니다. 집안일뿐만 아니라 일터에서 끝내지 못한 밀린 일들까지 들고 온 날에는 정말 할 일이 태산인데, 아직도 아이에게 자신의 일을 온전히 넘기지 못하고, 엄마의 성에 차지 않아 대신해주는 일들이 가득하다. 매번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해야지...’ 하면서도 여전히 손이 많이 가는 듯한 아이를 키우는 성질 급한 엄마는 또 엄마 손을 대고 만다. 마음과 몸이 따로 움직인다. 매일 이런 일상의 반복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손을 조금씩 놓으려는 엄마의 속마음 덕분인지 변화의 조짐이랄까, 아이의 독립적인 모습이 보이는 부분들이 적지 않게 발견될 때가 있다. 식사가 끝나면 스스로 자신의 빈그릇을 싱크대에 올려놓고, 세탁기에서 빨래가 나오면 함께 빨래를 널고, 건조되면 빨래 개기도 곧 잘 거든다. 마트 심부름도 척척 해내고, 자신이 해야 될 일들의 계획표를 보면서 끝내지 못한 것들은 늦더라도 마무리를 하려는 모습이 제법 초등학생 같아 보여 흐뭇할 때가 있다. 이런 모습들을 볼 때마다 엄마인 나는 또다시 마음을 다잡게 된다. 아이는 스스로 잘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질수록 더 자신감 있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달을 때마다 매번 무너졌다, 세워졌다를 반복하는 엄마 마음에 언젠가는 헤어질 내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정신이 번쩍 든다. 아이에게는 한없이 마음이 약해지는 엄마인 내 모습을 보면서 또 형편없는 초보 엄마 티를 팍팍 내지만, 어찌 됐든 ‘아이의 독립심 길러주기’는 멈추지 않고 있다. 


 다른 집 아이들에게는 너무 쉬워서 아무것도 아닌 듯한 일들도 처음 아이를 키우는 나에게는 언제나 큰 결심과 실천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들이 많았다. 다른 어떤 일보다 육아는 특히 그랬다. 문제마다 큰 산처럼 느껴졌다. 어찌 내게는 이렇게 물 흐르듯 쉽게 쉽게 흘러가는 일들이 하나도 없는지 오히려 신기했다. 그리 대단한 육아를 하는 것도, 그리 특별한 육아를 하는 것도 아닌데 늦된 아이와 초보 엄마의 육아는 늘 탈이 많았다. 느긋한 엄마가 되라는 주위의 충고에 나는 늘 속으로 외쳤다. “느긋한 엄마요? 맞아요, 성격 급한 엄마 성질대로 생활교육을 시켰더라면,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한치의 양보도 없는 입시학원 원장인 엄마의 성질대로 시켰더라면, 제 아이는 세 살에 어디에 내놔도 살아갈 아이로 자랐을 겁니다. 영어를 줄줄 읽고 연산을 척척 해내는 아이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육아에 있어서만큼은 느긋하다 못해 게을렀던 엄마였습니다. 아이가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오로지 뛰어놀게 하고, 보고 싶다는 어린이 영화들 실컷 보게 하고, 동화책만 주야장천 읽어주었던 아이로 키운 엄마입니다. 아이가 좋아하지 않아 그 흔한 색칠놀이 책 한 권도 시켜보지 못했고, 기저귀 떼기조차도 40개월이 넘어 뗄 만큼 뭘 재촉하지도 않았고, 너무 가르치지 않고, 시키지 않아 문제 된 엄마입니다. 지금도 또래보다 많이 늦는 아이인데, 얼마나 더 느긋해야 될까요?” 이렇게 혼자서 나직이 외치면서 마음속 다른 한구석엔 아이의 자기 주도적인 삶, 아이의 독립심 길러주기를 큰 숙제처럼 안고 있는 엄마였다. 지금도 다잡고 다잡은 엄마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늘 마음을 정돈하며 아이의 습관 만들기에 힘을 쓰고 있는 엄마다. 덕분에 늘 “엄마가 해줘.”, “엄마랑 같이 할래.”, “엄마랑 있을 거야.”를 입에 달고 살았던 아이는 아무리 말해도 안 되는 것은 안된다며 매몰찬 엄마의 모습을 몇 개월 경험하고 나더니, 자신을 스스로 챙길 줄 아는 아이가 되어가고 있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도 너무 의지하는 아이가 아닌, 자신도 누군가를 도울 줄 알고, 챙길 줄 아는 아이가 되어가고 있다. 


 엄마가 강하게 마음먹으면 아이도 강인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나간다. 독한 마음까지는 가슴이 아파서 무너질 때가 많았지만, 강하고 단단한 마음은 아이와 엄마의 삶에 활력을 주었다.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가장 무서운 선물이 ‘과잉보호’라고 하지 않는가? 아이에게 자립심을 선물하는 엄마가 되기 위해, 헤어짐을 위해, 나는 오늘도 내 품에 아이가 머무는 이 시간, 내 아이에게 준비해 줄 수 있는 선물을 어떤 것으로 마련할까 고민하는 엄마가 된다. 오늘도 엄마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로 아이와 함께 성장하고, 함께 노력하는 우리의 성장일지를 채워가고 있다. 이런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참 감사한 육아의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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