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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은 May 24. 2024

집 앞에 엄마를 협박하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심지어 우리 집도 아닌 곳에서

아빠는 생일에 맞춰 정년퇴직을 하고, 우리 가족은 그날만큼은 오빠의 일을 모르는 채 축하 파티를 열었다. 평생 제대로 된 노트북 하나 없이 지냈던 아빠에게 백만 원도 안 되는 노트북을 선물했다. 아빠는 돈이 어디서 났냐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우리 아빠. 고생하셨어요. 저희의 아빠로 태어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시작되는 제2의 인생도 저희가 함께 응원할게요. 사랑합니다.”

눈물을 겨우 머금은 채 읽은 편지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몇 달 후, 우리는 또 하나의 문제에 부딪혔다. 전셋집 계약이 끝나는 시기였기 때문에 이사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많은 고민 끝에 바퀴벌레가 나오는 전셋집을 떠나 아빠, 엄마, 나 우리 셋은 할머니 댁에 얹혀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제일 큰 안방, 나는 중간 방 그리고 엄마, 아빠는 제일 작은 방을 쓰게 됐다.


혼자 살던 할머니는 우리와 같이 사는 게 불편하다며 매일 이야기했고, 육십이 넘은 나이에 엄마 집에 얹혀사는 아빠와 엄마는 늘 눈치를 봤다. 엄마와 할머니의 고부갈등은 나를 피로하게 만들었고, 바퀴벌레가 나오는 집이 그리울 정도로 숨이 막혔다.


숨 막히는 나날이 반복되던 어느 날, 엄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한참 동안 통화하는 걸 듣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심각한 일 같았다. 엄마는 급하게 옷을 입고 아빠에게 이야기한 뒤 일 층으로 내려갔다. 무슨 일인가 창문으로 살짝 내려다본 그곳엔 키가 180cm 정도 되는 남자들 네 명과 그들의 우두머리 같은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엄마는 무척 당황해하며 그 사람들을 설득하는 듯 보였다. 무슨 일인가 아빠에게 물어보니 고리대금업자들이 찾아왔다고 했다. 엄마가 이자를 내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으니 직접 찾아온 것이다.


다급한 목소리로 아빠에게 내려가서 엄마를 도와야 하지 않겠냐고 묻자 “우리가 가도 할 수 있는 건 없어. 할머니 알아차리시기 전에 엄마가 잘 마무리하고 올 거야.”라는 냉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 아빠의 태도가 정말 멋없고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지금 와서 돌아보면 아빠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 진한 탄내를 풍겼을 텐데 말이다. 그 냄새를 맡지 못했을 뿐인데.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고 그제야 엄마가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방에 있는 할머니 때문에 엄마는 마음대로 울지도 못했고, 그저 울음을 삼켜내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 사람들은 이번 달까지 이자를 갚지 않으면 다시 찾아올 것이고, 집을 압류하겠다는 협박을 했다고 한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수중에 남은 돈은 없는데 대책이 없었다. 할머니에게 손을 벌리거나 나까지 대출을 받아야만 했다. 방법을 고민하던 중 엄마는 우선 좀 쉬어야겠다며 방에 들어갔다. 우리 집, 아니 얹혀사는 할머니 집에서 제일 작은 방. 두 명이 누우면 꽉 차는 방에서 엄마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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