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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은 May 20. 2024

아빠의 정년퇴직

불쌍한 우리 아빠

“엄마, 무슨 일이야?”


안방 문을 급하게 열자 눈이 빨개진 엄마가 앉아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오빠는 나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엄마를 통해 몇 번의 대출을 받은 상태였다. 사업 때문이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은 엄마는 아빠의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오빠가 거짓말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엄마는 혼자 질 수 없는 짐임에도 불구하고 아빠가 받을 충격으로 인해 이도 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무조건 아빠한테 말해야지. 엄마가 말 안 하면 내가 다 뒤집을 거야.”

나는 단단히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도 고민이 많은 상태에서 내가 화를 내자 오히려 괴로워했다. 더 이상 나의 말을 듣지 않을 거로 생각한 나는 방문을 닫고 나와버렸다.


일주일 후 엄마는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더 늦기 전에 아무래도 네 말대로 아빠에게 알려야겠다는 거였다. 이제야 그걸 알리다니.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빠는 정년퇴직을 한 달 앞둔 시기에 오빠가 벌인 일을 엄마에게 듣게 되고, 다음 날 오빠는 집으로 불렸다. 아빠의 화가 나다 못해 어이없는 표정 건너편으로 잔뜩 긴장한 얼굴의 오빠가 앉아 있었다. 웃음소리와 말소리로 가득했던 우리 집은 베일 듯한 차가움으로 뒤덮였다. 그 누구도 말을 먼저 꺼내지 못하고 그저 바닥만 바라본 채 기다릴 뿐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봐.”

아빠의 날카로운 한 문장이 차가운 침묵을 깼다. 오빠가 눈물을 글썽이자 엄마는 오빠를 대신에 나서려고 했다.

“당신은 가만히 있어.”

침묵이 흐르고 오빠는 겨우 한 문장을 꺼내기 시작했다. 작년에 했던 게 실수라고 생각했지만 사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하면서 다시 주식에 손을 대게 되었다고. 한 번 돈을 벌면 몇억씩 들어오기 때문에 손에서 일분일초도 휴대전화를 놓지 않고 살았다고.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어서 엄마를 통해 대출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엄마의 명의로 대출받은 건 거의 몇천만 원이었다. 하지만 이건 새 발의 피였다.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어보니 오빠는 은행과 지인에게 빌린 돈 그리고 고리대금까지 몇십억의 빚을 지게 됐다. 아빠는 감당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고, 나는 증오하는 눈으로 오빠를 쳐다봤다. 자기만 손해 봐도 뒤집어질 일을 엄마까지 손해를 끼치다니.


나와 언니는 다음 달 아빠의 정년퇴직을 앞두고 깜짝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파티보다 더 한 걸 오빠는 혼자서 준비해 놓고, 폭탄 같은 소식을 대뜸 아빠에게 던진 격이다. 40년이라는 시간을 나와 오빠, 그리고 언니 삼 남매를 키우기 위해 마라톤처럼 꾸준히 달려온 아빠는 마지막 레이스를 통과하기 전 주저앉게 되었다.


이제 다음 달이면 백수가 되는 아빠에겐 몇천만 원의 빚을 진 아내와 몇십억 원의 빚을 진 아들이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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