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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또 Oct 16. 2023

32) 냉탕에서 온탕, 그리고 다시 냉탕


 내가 선택한 비행편은 중간에 아랍에미레이트의 아부다비를 경유해야 했는데, 나는 일부러 아부다비를 더 오래 구경하고 싶어서 경유 시간이 긴 항공편을 택했다. 아부다비에서 11시간의 자유시간이 생긴 나는 더운 날씨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고 아부다비 시에서 운영하는 무료 셔틀버스에 올랐다. 원래 차 안에서 창밖 구경 하는 일을 좋아하는 나는 여행을 할 때도 종종 그 방법을 애용하곤 했다. 나에게 버스란 운전 스트레스와 오래 걷기의 피곤함 없이 그 도시의 생생한 모습을 가장 잘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었다.


 그런데 이 무료 셔틀버스는 외관 전체가 코팅이 되어 있어 창 밖 구경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은 바로 운전기사였는데, 그는 교통이 혼잡한 아부다비 시내에서 난폭운전을 하는 것도 모자라 큰 소리로 영상통화를 하기도 했다. 비행으로 인한 피로에 따뜻한 날씨까지 겹쳐 노곤노곤한 기분에 나는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도 그가 호통치듯 통화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곤 했다. 그렇게 나는 창 밖 구경도 제대로 못하고 쪽잠도 제대로 못 잔 채로 아랍에미레이트에서 가장 큰 규모라는 셰이크 자이드 그랜드 모스크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순백색의 모스크는 한눈에 봐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이 여정의 막바지에 들어선 나에겐 이제 새로운 걸 봐도 놀랍거나 신기하게 여길만한 호기심과 탐구심이 거의 남지 않았다는 거였다. 모스크의 입구 맞은편엔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는데 그걸 타고 내려가보니 백화점같이 다양한 물건을 파는 가게들과 푸드코드 같이 음식을 파는 곳들이 나왔다. 배가 고파 뭐라도 먹으려고 슬쩍 가격을 봤더니 예상대로 메뉴가 다 너무 비싸서 그곳에선 차마 고를만한 게 없었다. 결국 나는 실외에 있는 간이 푸드트럭 같은 곳에서 태국씩 쌀국수를 골랐는데 야외 테이블에서 먹는 0.7인분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쌀국수조차 한 그릇에 한화로 17,000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 혹은 가족들과 함께 와서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돌아다닐 때 홀로 벤치에 앉아 고독을 씹었던 나는 모스크의 사진만 몇 장 남기고 다시 공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시내로 나올 때는 시간이 맞아 공항까지 데리러 온 카우치 서핑 친구의 차를 탔지만, 다시 공항으로 돌아갈 땐 내가 알아서 돌아가야 했던 나는 고작 차로 15분 정도 거리에 택시비를 3-4만 원이나 태워버리고 싶지가 않아서 무던히 머리를 굴렸다. 백화점 구석에서 와이파이를 빌붙어 쓰면서 열심히 정보를 검색하던 나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정류장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는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히치하이킹을 30분쯤 시도하다 실패한 나는 결국 3.3km 거리에 있던 그 정류장까지만 택시를 타고 이동하기로 나와 합의를 봤다.


 도착한 그 정류장에서 나는 드디어 교통카드를 살 수 있는 기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카드결제가 먹히지 않아 무조건 현금만 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거였다. 현금을 쓸 상황이 생길 거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던 나는 수중에 현금이 단 한 푼도 없었다. 혹시 내가 기계 조작을 잘못한 건 아닐까 싶은 생각에 나는 옆에 있는 현지인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퇴근 중인 직장인으로 보였던 한 남성이 나를 도와 기계를 이리저리 만져보아도 결국은 같은 결과였다. 내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본인 지갑에서 돈을 꺼내 기계에 집어넣더니 기계에서 나온 교통카드를 나에게 전해주었다. 그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던 나는 가지고 있던 달러나 유로라도 주겠다고 했는데 그는 거듭 괜찮다면서 절대 받질 않았다. 예상치 못한 현지인의 도움에 나는 순간 가슴이 벅찼다.


 약 30분쯤 기다려 고대하던 공항버스를 마주할 수 있었던 나는 사람들을 따라 버스 입구 쪽으로 줄을 섰다. 내 앞에 있던 사람이 두세 명쯤 타고나서 내 순서가 되었는데, 버스기사가 갑자기 버스를 타려는 나를 제지하면서 버스에 빈자리가 없어서 더 이상 탈 수가 없다고 하는 거였다. 이 버스를 놓치면 무조건 비행기를 놓칠 판이라 나는 거의 울먹이면서 잠깐이면 되는데 서서 타면 안 되냐며 기사님에게 간청을 했다. 내 사정이 딱한 줄은 알면서도 이런 일을 겪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기사님의 태도는 단호했다. 결국 나는 그렇게 내 눈앞에서 공항버스를 보내야 했고, 고작 한두 푼 아끼려고 이렇게까지 고생한 모든 나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은 허망함에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때 바로 내 뒤에 서서 같은 공항버스를 기다렸던 알리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자기도 공항에 가야 하는데 몇 시 비행기냐고 내게 묻는 거였다. 나보다 한 시간 더 여유가 있었던 그는 다음 버스를 타고 가도 괜찮았지만 나를 위해 기꺼이 같이 택시를 타고 가자는 제안을 했다. 나는 그에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그와 함께 택시에 올랐다. 영국인인 그는 직업이 자유시간이 많은 프리랜서이기도 하고 원래 여행을 좋아해서 이렇게 자주 혼자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다음에 한국에 온다면 정말 맛있는 삼겹살에 소주를 대접해 줄 테니 언제든 연락만 달라고 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오케이싸인을 들어 보였다.




 뭄바이 공항에 도착한 나는 도착하고 나서 세 시간이 지날 때까지 공항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인터넷에서 미리 비자에 대해 알아보니 같은 값에 인터넷으로 사전신청하는 비자는 한 달짜리이고, 현장에 도착해서 신청하는 도착비자는 두 달짜리라서 나는 일부러 도착비자로 선택을 했던 거였는데 그게 결국은 이 사달을 만든 거였다. 도착비자라고는 꼴랑 한국, 일본, 아랍에미레이트 세 나라밖에 받지 않는다고 공항에 떡하니 써놨으면서도 내 여권을 보고는 싸우스 코리안인지 노쓰 코리안인지 묻는 직원들 때문에 나는 열불이 터질 지경이었다.


 내가 수기로 쓴 서류를 가져가면 직원은 그걸 하나하나 독수리 타법으로 다시 전산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한 직원이 그렇게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하는데도 그 뒤에 셋넷쯤 되는 직원들은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면 떨었지 일을 도우려는 생각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10분을 기다리라고 해서 20분을 기다리다 돌아가면 다시 10분을 더 기다리라고 하고서 또 30분이 흘렀다.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가는데 지금 여기서 애가 닳는 사람은 오직 나뿐인 것 같았다.


 내가 서류 진행 과정이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문제가 있는 건지 설명을 해달라고 해도 그들은 계속 모르쇠였다. 오히려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미리 비자를 신청하는 건 이유가 있는 것."이라면서 나를 약 올리기까지 했다. 직원들은 공격적인 말투로 불만표현을 하는 나에게 너나 할 것 없이 목에 스프링이 달린 인형처럼 고개를 좌우로 까딱까딱거렸는데 그 모습이 나를 놀리는 것 같아서 더 열받았다. 나는 그것이 '글쎄'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대중적인 제스처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 수가 있었다.


 결국 새벽 2시 30분에 뭄바이에 착륙을 했던 나는 동이 터오는 6시가 넘어서야 아무런 문제 없이 공항을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덩달아 나를 네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던 나의 카우치 서핑 친구 알귀야에게 나는 너무나 면목이 없었다. 택시를 불러 나를 호스텔까지 데려다준 그는 나의 체크인을 도운 다음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체크인 시간이 될 때까지 공용공간에 있어야 했던 나는 구석의 소파에서 몸을 구긴 채 눈을 감고 있다가 아침이 되자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별 달리 갈만한 곳이 없었던 나는 체크인 시간인 1시가 될 때까지 계속 시장통 같은 소음 속에서 억지로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내 첫 뭄바이 호스텔은 남녀혼성 40인실이었다. 큰 방에 2층 침대가 끝이 안 보이게 놓여 있던 그곳은 화장실조차 공용이어서 지내는 데에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다. 다음 날 다시 숙소를 옮기기로 하고 저녁 약속에 가기 전에 일찍이 밖을 나가 주변을 둘러보는데, 내 호스텔 바로 옆에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골목이 말로만 듣던 할렘가였던 거였다. 판자로 지은 빽빽하고 좁은 집 앞엔 더위에 지쳐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부채질을 하거나 거품물을 내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빼빼 마르고 새까맣게 탄 아이들은 신남을 주체할 줄 모르는 강아지처럼 여기저기 마구 뛰어다녔다. 나는 그들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죄의식이 느껴져서 최대한 의식하지 않은 채 앞만 보고 걸으려고 노력을 해야 했다.


 하필 이집트와 인도 사이에 아랍에미레이트를 넣어서 하루 만에 서민들의 삶의 수준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느낌이 들자 나는 적응이 잘 안 될뿐더러 기분이 이상했다. 고작 몇 시간 만에 나는 뭐 하나 사 먹기도 손 떨리는 나라에서 뭐 하나 사 먹기도 걱정스러운 나라에 오게 된 거였다. 원래 동남아를 좋아하는 나라서 인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고 만만하게 봤던 건 내 오산이었다. 내 고생길의 역사는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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