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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또 Oct 14. 2023

30) 이집트에서 히치하이킹하다가 경찰차 탄 사연


 시와의 호스텔에서 머물던 나는 호스텔을 관리하는 직원과 이내 친해졌는데 그와 얘기를 하다 보니 이 호스텔의 주인이 메르사 마트루라는 곳에 같은 이름의 호스텔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가 카우치 서핑에서 호스트로도 활동하기 때문에 그곳에 가면 무료로 숙박을 제공받을 수 있다는 거였다. 나는 직원에게 받은 연락처로 메르사 마트루에 있는 호스트 프라지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나에게 언제든지 방을 제공해 줄 수 있으니 오고 싶을 때 오라고 답을 했다.


 다음 날 나는 바로 채비를 해서 메르사 마트루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까지 이집트에서 제대로 된 콘텐츠를 뽑지 못했던 나는 시와에서의 촬영계획도 이상한 호스트가 다 망쳐버리자 슬슬 위기감이 닥쳐왔다. 결국 이색 도전이라도 해볼까 하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바로 히치하이킹이었다. 차로 네 시간이 걸리는 300km의 거리를 히치하이킹으로만 이동해 보겠다는 무모한 미션을 스스로 만든 것이다.


 내 계획을 들은 호스텔의 직원은 나를 만류하고 나섰다.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니 나중에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나 도전해 보라는 거였다. 그래도 나는 한 번 마음먹은 이상 시도라도 해봐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나는 호기롭게 길을 떠났다. 큰길에 들어서는 길목에 서서 나는 당당하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히치하이킹'의 개념조차 모르는 듯 나를 신기한 사람 구경하듯 쳐다보고 지나갔다. 그러고 20분쯤 서있자 나는 겨우 차 한 대를 멈춰 세울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다음 난관은 언어였다. 이집트의 주요 도시도 아닌 외진 곳에 있던 그 지방도시는 호텔이나 상점 이외에선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차를 멈춰 세워놓고도 그들과 의미 있는 대화를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나는 바디랭귀지로 내 의견을 전달해서 가까스로 어떤 트럭의 뒤에 탈 수가 있었다.


 나를 태우고 10여분 정도를 달린 그 트럭은 나를 큰 길가의 군사기지로 보이는 곳 앞에서 내려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다시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차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였다. 간혹 가다 트럭이나 버스가 멈춰 섰지만 돈을 내야 탈 수 있다고 해서 결국 타질 못했다. 나의 히치하이킹 도전에는 '금전적인 대가 없이'라는 내가 스스로 세운 기준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두 시간쯤 됐을까. 이번에 내가 멈춰 세운 차는 다름 아닌 경찰차였다.


 일단 세워놓고 나서 경찰차인 것을 깨달은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그들을 그냥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나의 목적지를 묻던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 메르사 마트루로 가는 길이라며 나보고 호쾌하게 바로 타라는 거였다. 다른 차도 아니고 경찰차다 보니 나는 안심하고 바로 차에 올랐다. 앞쪽에 두 명, 뒤쪽 트럭자리에 세 명이 타고 있던 그 차에서 나는 간식까지 받아먹으며 그저 여유롭게 속으로 축배를 들고 있었다.


 잘 달리던 경찰차는 이내 어떤 검문소 같은 곳에 멈춰 서더니 앞에 탄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린 후 한동안 돌아오지 않는 거였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서 나는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했다. 이윽고 다시 차로 돌아온 그들은 갑자기 핸들을 꺾어 돌아온 길을 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영문도 모른 채 다시 시와로 돌아가던 나는 그들에게 번역기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조수석에 앉은 경찰관이 자기들의 일정이 변경되어 메르사 마르투까지 갈 수가 없으니 나를 버스정류장으로 데려다주겠다는 거였다. 아까 그곳은 너무 위험해서 나를 다시 내려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렇게 다시 익숙한 그 동네로 돌아온 나는 허망함에 헛웃음만 나왔다. 내가 시와를 떠난 지 꼭 다섯 시간 만의 일이었다. 경찰차엔딩이 될 줄 알았던 나의 히치하이킹 도전은 결국 남들과 똑같은 버스엔딩이었다. 알고 보니 버스비가 고작 한화로 3000원돈밖에 되지 않아서 나는 더 현타가 왔다. 교통비가 비싼 아이슬란드 같은 나라라면 모르겠는데, 기름이 1리터에 500원밖에 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히치하이킹이란 정말 부질없는 짓이란 걸 그제야 깨달았던 거였다.




 메르사 마트루의 호스트 프라지는 호텔과 호스텔을 함께 운영하고 있는 말하자면 그 지역의 부호였다. 비즈니스를 확장하고 더 많은 글로벌 고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영어회화실력이 필요했던 그는 이렇게 다양한 게스트들에게 영어를 배운다고 했다. 내 방엔 나 말고 미국에서 온 린다라는 증년 여성게스트가 한 명 더 있었는데 그녀는 이곳에서 한 달 정도를 무료로 머무는 대신 그에게 매일 한 시간씩 영어수업을 해준다고 했다. 린다와 나는 번갈아가며 저녁 당번이 되어 양식과 한식을 넘나드는 식사를 준비했고, 아침저녁으로 바쁜 프라지는 저녁 8시가 넘은 시각에야 일을 마무리하고 우리와 함께 저녁을 먹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하루는 프라지가 본인의 아내를 우리에게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저녁식사 시간에 초대를 하겠다기에 나는 알겠다고 한 후 오후에 혼자 밖에 나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시간에 맞춰 방으로 돌아왔는데 웬 처음 보는 어린 소녀가 그곳에 있는 거였다. 지점토처럼 하얀 피부에 낙타같이 긴 속눈썹을 가진 그 아이는 어울리지 않는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방 앞에서 뻘쭘하게 서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수줍게 웃어 보였다. 뒤이어 등장한 린다가 내게 이 아이가 프라지의 아내 흐디아라며 소개했다.


 올해 열일곱 살이 되었다던 흐디아는 방학중에 프라지와 결혼식을 올렸다고 했다. 그녀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내 눈에도 이렇게 곱고 어린아이가 이미 5살짜리 아이도 있는 자기 나이 두 배 뻘의 남자에게 재혼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안타까운데 그녀 부모님의 마음은 어떨지 상상이 되지가 않았다. 우리의 게스트룸과 프라지의 신혼방은 둘 다 프라지가 운영하는 호텔의 꼭대기층에 있었는데, 먼 동네에서 이곳으로 시집을 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그녀는 하루종일 그저 집 안에서 프라지의 출근준비를 돕고 그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 하루의 일과라고 했다. 우리나라였으면 한창 꿈 많고 친구들과 놀길 좋아할 여고생이었을 텐데 이곳에서 가정부처럼 살아야 하는 그녀가 나는 너무 안쓰러웠다.


 흐디아는 나보다 한참이나 어렸지만 그 손끝은 매우 야무져서 집안일도 요리도 척척 못해내는 게 없었다. 하루는 그녀가 이집트식 전통 요리를 준비할 생각인데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서 그녀가 지내는 신혼방으로 가 요리를 도왔던 적이 있는데 오후 2시에 시작한 요리는 저녁 8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끝이 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생쌀에 여러 다진 재료와 소스를 넣고 섞은 것을 데친 양배추로 감싸 쪄내기도 했고, 속을 파낸 애호박과 파프리카 안에 다진 고기를 넣고 치즈를 얹어 구워내기도 했다. 그 모든 과정의 일부를 잠깐 두세 시간 정도 도왔을 뿐인데도 나는 금방 녹초가 되어 바닥 구석에 뻗어있었더니 그런 나를 보며 그녀가 깔깔 웃었다.


 그녀가 밥상을 차려내자 프라지는 고객 접대를 해야 한다며 그녀가 차린 거한 밥상을 들고 손님방으로 가서 식사를 했다. 우리는 그가 가져가고 남은 음식들로 그녀의 신혼방 거실에 둘러앉아 배를 채웠다. 손님과의 식사를 마치고 우리와 함께 티타임을 가지던 프라지는 우리가 흐디아의 요리실력을 치켜세워주자 으쓱한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곧이어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에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배신감이 들었다. 그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 옆에서 "나중에 돈을 더 많이 벌게 되면 그녀보다 어린 와이프를 하나 더 얻을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가 너무 역겨웠다.


 분명 프라지는 주변사람들에게 많이 베풀 줄 아는 좋은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이슬람 문화적 사상은 또 다른 이야기였던 것이다. 나는 어린 나이에 성에 갇힌 공주처럼 이 호텔의 꼭대기층에 갇혀 프라지의 아이를 낳고 엄마와 아내로서의 삶을 감당해 내야 하는 흐디아의 운명이 너무나도 안타깝게 느껴졌다. 내가 그런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하루라도 더 많이 공부하고 배워서 좋은 아내, 좋은 엄마 말고 너의 꿈을 꼭 만들라는 말 뿐이었다. 번역기가 내 진심을 잘 전해주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메르사 마트루를 떠나는 날, 나는 그녀에게 내가 유럽 여행을 하면서 틈틈이 샀던 예쁜 블라우스와 원피스들을 골라 전해주었다. 나는 다른 곳에서 예쁜 옷을 살 기회가 얼마든지 있지만 호텔 건물 안에서 이동할 때조차 검은 천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가리고 다녀야 하는 그녀에겐 그나마 방에 혼자 있을 때라도 예쁜 옷을 입어보는 일이 삶의 낙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또 한편으로는 그녀가 옷장에 걸려있는 그 옷을 볼 때마다 나를 떠올려줬으면, 내가 당부했던 그 이야기를 잊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선 종교적 혹은 문화적 배경에 따라 말도 안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종교 선택의 자유를 갖지 못한 이들이 종교적 가르침만이 삶의 진리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로 하여금 종교를 내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얼마나 자유로운 삶인지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내가 다시 그곳을 찾게 된다면 본인의 꿈을 찾아 행복하게 살고 있는 흐디아를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작은 소망을 마음에 간직한 채 나는 그녀와 아쉬움 가득한 작별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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