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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또 Oct 13. 2023

28) 이상한 남자, 착한 남자, 다정한 남자.


 나는 모로코의 최북단 탕헤르에서 스페인 타리파로 넘어가는 페리를 탔다. 배를 타고 국경을 넘어보는 경험은 또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크게 특별한 건 없었다. 그저 모로코와 스페인 사이의 지브롤터 해협이 유난히 파랬던 것만 기억이 난다. 타리파에 도착한 나는 세비야를 거쳐 곧장 포르투갈로 이동했고, 수도 리스본을 지나 포르투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간 다음 육로로 피사, 로마를 거쳐 다시 이집트로 향했다.


 생에 처음 가 본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이탈리아였지만 특별한 에피소드 없이 넘어가는 이유는 이미 오랜 여행으로 유럽에 싫증이 난 상태였기 때문에 별 감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평화롭고, 어느 골목을 가도 돌길이 펼쳐지는, 피자와 파스타가 맛있던 나라들이라는 공통점 외에 다른 부분에서 나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즈음 유럽여행의 대부분을 호스트의 집에서 호스트와 요리를 해 먹고 수다를 떨며 보냈다. 말하자면 일종의 재충전의 시간이었던 셈이다.




 유럽에서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나는 마치 전투태세를 갖춘 배낭여행자의 마음으로 공항에 앉아있었다. 나를 데리러 오기로 한 호스트가 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영어도 잘 통하지 않던 그는 내가 오기로 한 게 저녁인 줄 알았다면서 횡설수설을 하다가 계속 도착 예정 시간을 조금씩 미루고 미뤄서 결국 내가 공항에 도착한 지 세 시간이나 지난 후에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모자라 나를 차에 태우고 시내를 향해 가던 그는 별안간 주유소에 차를 세우더니 나에게 기름값을 요구했다. 그래도 택시비보다는 기름값이 저렴하지 않냐며 생색을 내는 그의 얼굴에 욕을 뱉을 수는 없어서 나는 그냥 말없이 웃어주었다.


 내가 그를 호스트로 택한 이유는 그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어서 비교적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는 갑자기 자기 아내가 부모님 병간호로 친정에 가 있어서 나를 집으로 데려갈 수 없다며 자꾸 자기 친구의 호텔을 나에게 추천하는 거였다. 자기가 돈을 내줄 것도 아니면서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너무 뻔뻔해서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알렉산드리아 시내에 있는 호스텔을 예약했다. 내가 뭐 하느라 이렇게 시간낭비 돈낭비를 해가면서 공항에서 오래도록 그를 기다렸는지 모르겠어서 나는 짜증이 솟구쳤다.


 그는 내게 미안한 감정이 조금은 있었는지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배가 고픈 참에 잘 됐다 싶어서 나는 그를 따라 근처의 코샤리(이집트식 파스타) 집으로 갔다. 맛이 너무나 궁금했던 코샤리는 기대 이상으로 맛이 있진 않았지만 배가 많이 고팠던 탓인지 계속 손이갔다. 스트레스를 받았더니 매운맛이 땡겨서 식탁 위에 있던 매운 다대기를 듬뿍 넣었더니 정수리에서 땀이 났다. 내가 양손으로 부채질을 해가며 헥헥대자 그런 나를 보며 그는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밥을 먹은 후 조금 풀린 기분으로 숙소에 돌아와 쉬었다.


 다음 날 나는 나 때문에 휴가를 냈으니 빨리 밖으로 나와 함께 놀자고 닦달하는 그의 전화 때문에 잠에서 깼다. 그가 휴가를 냈든 말든 나는 알 바가 아니고, 내 잠을 방해하는 그가 얄미워서 나는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서 밖에 나갈 계획이 없다고 단호히 선을 그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내게 수요 없는 사랑고백을 하며 폭주를 하기 시작했다. 이집트에 도착한 지 하루 만에 받은 애 딸린 유부남의 사랑폭격은 내게 이집트 남자에 대한 강한 선입을 남겨주었다.


 그다음 날 저녁에 나는 카우치 서핑에서 알게 된 하이샴이라는 친구를 만났다. 하루종일 차와 오토바이들이 경적을 울려대는 소리가 호스텔 창문을 뚫고 방 안까지 울려대는 통에 나는 호스텔 안에 있어도 잠을 푹 잘 수가 없었다. 계속 방 안에만 있다가는 우울의 골이 더 깊어질 것 같아서 나는 나 스스로를 밖으로 끄집어내야 했다. 연락을 주고받던 친구들 중에 그나마 그가 제일 정상처럼 보여서 나는 그와 약속을 잡았던 거였다.


 하이샴은 약속장소에 약속시간보다 10분이나 늦게 나타났다. 약속시간을 조금 늦는 일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이 사실이 아직까지 내 기억에 인상 깊게 남아있는 이유는 여유로운 태도로 나타난 그가 본인이 늦은 것에 대해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이집트인들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다. 10분 20분쯤 늦는 것은 당연한 거고, 30분쯤 늦으면 조금 늦게 온 거고, 1시간쯤 늦어도 별 말을 안 했다. 나는 이들의 신통방통한 시간계산법에 익숙해져야 했다.


 오랜만에 긴 휴가를 내고 어머니가 계시는 본가에 와서 쉬는 중이라던 그는 트위터 본사의 필리핀 지부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꽤나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그는 외국물을 조금 먹어서인지 여자를 대하는 매너도 있는 편이었다. 첫 만남에 나를 근처의 해산물집으로 데려간 그는 생선과 새우등을 푸짐하게 시켜서 내게 대접했다. 오랜만에 보는 자기 친구를 한 명 초대해도 되냐기에 당연히 오케이를 했는데 알고 보니 그가 말한 친구라는 사람은 그의 엄마뻘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다. 아쉽게도 그녀는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나는 그와 그녀가 아랍어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열심히 내 앞에 있는 음식들을 처치했다.


 필리핀에서 결혼을 했다가 4년 만에 이혼하고 다시 돌싱이 된 지는 1년남짓 되었다던 그는 꽤나 다정한 남자였다. 우리는 다음날도 만나서 함께 근처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시장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즉흥으로 텐스 오브 라마단에 사는 그의 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우리는 그의 집에서 차를 세 번이나 갈아탄 다음에야 가까스로 그곳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이미 시간은 11시였지만 우리는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그다음 날이 바로 그의 친구인 하싼의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이샴의 친구라던 하싼은 아이가 둘 있는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기러기 아빠였다. 30대 초반인 하이샴이 왜 본인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들을 친구로 두고 있는지 나로서는 잘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아무튼 하이샴이 전 직장동료라고 소개해준 하싼은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 우리를 본인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는 자기가 쓰는 안방을 나에게 내어주고 본인은 하이샴과 같이 거실에서 잠을 자겠다고 했다. 나는 그 호의가 부담스러워 거절했지만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인 그는 새벽에 거실에서 기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본인이 거실에서 자는 게 편하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이샴과 하싼, 그리고 나까지 셋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거실로 나가보면 하싼은 이미 출근을 해서 없고 나처럼 늘어지게 늦잠을 자는 하이샴만 그곳에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같이 빵을 굽고 계란을 부치고 감자를 튀겨서 아침을 먹었다. 오후엔 걸어서 근처를 돌아다니며 동네구경을 하다가 저녁이면 퇴근한 하싼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가 요리솜씨를 발휘할 때도 있었고 밖에 나가 외식을 할 때도 있었다. 나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솔직히 처음 본 나를 친구 집으로 데리고 갈 생각을 하이샴이나, 친구가 생뚱맞게 데려온 친구를 오래 알던 사이처럼 대접해 주는 하싼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신기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나 그렇겠지만 내가 만난 몇 명의 사람으로 그 전체를 판단하는 일은 큰 오류일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그들의 세계 중에서 편의를 위해 나라와 민족이라는 분류로 구분을 할 뿐이지, 한 그룹 안에 속하는 사람들이 모두 같다고는 단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공유하는 문화라는 속성 또한 절대 무시할 수가 없다. 문화는 각기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깊은 연대감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나는 이집트에 도착하자마자 만난 상반되는 남성상의 인물들 때문에 이집트 남자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나로 하여금 생각이 자꾸 한쪽으로 기울게끔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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