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예또 Oct 17. 2023

34)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뭄바이에서부터 잠자리가 편치 못해 피로가 쌓였던 나는 사힐의 집에서 비로소 제대로 깊은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오후 두세 시까지 늦잠을 자고 일어나 눈을 비비며 방문을 열고 나오면 거실에서 재택근무 중인 사힐이 내게 입모양으로 늦은 굿모닝 인사를 했다. 그는 인도에서 꽤 규모가 있는 유통회사 HR부서의 관리자 직급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화상면접을 보거나 회의를 하는 등 하루종일 누군가와 영어로 대화를 하는 일이 많았다. 내가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소파에 누워 고양이와 장난을 치고 있으면 그는 통화를 마친 뒤에 나보고 주방에 음식이 있으니 어서 챙겨 먹으라며 알려주었다.


 업무로 인한 바쁜 스케줄 때문에 집안일할 사람을 따로 고용하고 있었던 그의 집에는 매일 요리사가 와서 밥을 만들어 놓고 청소부가 와서 집을 쓸고 닦았다. 정작 무슬림인 사힐은 라마단 기간이었던지라 해가 떠있는 낮동안엔 밥을 먹지 못하는데, 요리사가 정성껏 해놓은 음식을 내가 먼저 먹으려니 여간 죄책감이 드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면 나는 혹시라도 밥 냄새가 그에게까지 퍼질까 봐 항상 음식을 덥히지 않고 차가운 채로 그릇에 덜어 조금씩 먹었다.


 그는 매일 저녁 6시쯤이 되면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방에 들어가 무슬림 전통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은 뒤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나왔다. 그다음엔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에 있던 대추야자를 비롯한 제철 과일들을 먹기 좋게 손질하고 루오브자(Rooh Afza)라고 불렀던 분홍색 음료를 내 몫까지 2컵을 준비했다. 그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 기도를 마친 후 그날의 금식을 깨는 의식을 할 때에 꼭 나를 불렀다. 그러면 우리는 과일과 샐러드, 튀김 같은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간단한 요기가 끝나면 그는 다시 돌아가 일을 하거나 소파에 늘어져 푹 쉬었다. 8시쯤이 되면 요리사가 해놓은 음식으로 같이 저녁을 먹고 나서 그의 오토바이를 타고 고아의 구석구석을 누볐다. 소를 신성시하는 인도인지라 길거리엔 소들이 마구잡이로 싸놓은 똥냄새와 길거리에 방치된 쓰레기 냄새가 습한 공기를 타고 곳곳에 퍼져있었지만 그의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순간엔 그런 것들은 아무 문제가 안 됐다. 양팔을 쫙 벌리고 뺨에 스치는 공기를 느끼며 오토바이의 속도에 따라 맘껏 소리를 지르면 맘 속에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는 감사한 일상을 보내던 나는 과일 손질을 하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아 버렸다. 내가 나도 모르게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큰 키에 넓은 골격을 가진 남자가 무슬림 전통복장을 입으면 그렇게까지 섹시할 수가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그를 보고 처음 알았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가서 꽉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였다. 그렇지만 인도인에다가 무슬림, 그리고 까무잡잡한 피부, 깊고 진한 쌍꺼풀,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 얼굴의 반을 덮은 덥수룩한 수염까지. 그는 내가 여태껏 만나본 남자들과 어떤 공통점도 가지고 있지 않은, 말하자면 내가 여태껏 만나온 사람과 정 반대의 조건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내게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늦잠 자고 일어나서 늦은 점심밥을 먹고, 고양이랑 놀다가 다시 낮잠을 자고, 핸드폰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그와 저녁을 먹고, 산책이나 드라이브를 갔다가 다시 딴짓하느라 늦게 자는 내 일상을 다 알면서도 그는 아무런 간섭이나 충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애초에 부탁했던 일정보다 훨씬 더 오래 그곳에 머물고 있는데도 나의 앞으로의 계획이나 일정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 돈 한 푼 내지 않고 그의 집에 얹혀살면서 손 하나 까딱 않고 밥만 축내는데도 내게 듣기 아쉬운 소리도 하지 않았다. 1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의 여행에 대한 권태와 호기롭게 도전했던 여행 유튜브의 실패로 가장 한심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나를 그는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존중해 주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항상 마음이 편했다. 잘 보이려 외모를 치장할 필요도, 아는 게 많아 보이려 애써 나를 포장할 필요도 없었다. 개인적인 고민이나 볼품없는 가정사를 털어놓아도 그는 언제나 진지하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내가 망망대해를 표류하던 돛 단 종이배였다면, 그는 지친 내가 흔들리지 않고 쉴 수 있게 해주는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진 무인도 같았다. 그래서 그의 국적, 종교, 외모 같은 조건들은 그의 사람 됨됨이 앞에서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 거였다. 그때의 내겐 그와 함께 있으면서 내가 놀랄 만큼 심신의 안정을 되찾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목각인형이 되는 나는 마음 같아선 술이나 먹고 취기를 빌려 확 고백이라도 저지르고 싶었는데 라마단 기간이었던 사힐은 술을 입에도 댈 수 없었고 그렇다고 나 혼자 먹자니 주정뱅이처럼 보일까 봐 내키지가 않았다. 나는 지금 내가 그에게 고백한다고 한들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었기에 이 마음은 그저 나 혼자만 간직한 채 끝내는 게 맞다고 곧 스스로 판단을 내렸다. 고아에 놀러 온 사힐의 친구부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가 쓰던 방을 그들에게 내어주고 사힐과 같은 방을 이틀이나 썼으면서도 나는 결국 그에게 아무런 표현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에 대한 마음을 접고 이곳을 벗어나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떠나는 날 당일 아침에 내가 오늘 이곳을 떠날 거라는 사실을 그에게 알렸다. 내 말을 들은 그는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없이 그저 잘 가라는 말뿐이었다. 그의 반응을 보니 내가 품었던 감정이 나의 일방적인 감정이었다는 사실이 더 확실해진 것 같아 슬펐다. 호기롭게 그의 집을 떠나긴 했지만 마음 놓고 푹 쉴 수 있었던 아늑했던 보금자리와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곳을 떠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아서 나는 한동안 가슴이 먹먹한 채로 있었다. 하필이면 그가 일 때문에 바빠서 마지막 순간에 포옹조차 해보지 못했던 것까지 나는 모든 게 아쉬움 투성이었다.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버스에 탄 뒤로 계속 말없이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던 나는 버스가 고속도로에 들어설 즈음이 되자 오히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면서 되려 '이제라도 고백을 못할 건 또 뭐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내 마음을 다듬고 다듬어서 그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너와 함께 있는 동안 정말 즐거웠어. 네가 내게 베풀어준 모든 것들에 진심으로 감사해. 사실 나는 너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네가 무슬림이고 지금이 라마단기간이기도 하니까 너에게 다가가는 게 망설여졌어. 사실은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서 고민이 되기도 했고.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진심을 너에게 전하고 싶었어. 그럼 잘 지내.]


 메시지를 보낸 지 10분쯤 되었을까. 그에게 기다리던 답이 왔다.


 [나도 너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들이 아름다웠어. 함께 스쿠터를 타고 드라이브를 했던 거, 너와 나눴던 많은 이야기들... 절대 잊지 못할 거야. 너는 왜 진작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나는 너에게 부담을 줄까 봐 걱정이 되어서 일부러 너에게 거리를 뒀던 거야. 네 마음이 그렇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어. 빨리 돌아와.]


 내 예상과 달랐던 그의 대답을 읽자마자 입꼬리가 자꾸만 씰룩댔다. 그도 사실은 나와 같은 마음인 거였다. 그도 나를 좋아하고 있는 거였다. 그의 문자메시지를 받고 나니 다시 그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나는 이미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버스 안이었다. 그리고 내 작지만 소중한 여행유튜브 채널도 한 번 시작한 이상 여기서 이렇게 쉽게 포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집에서 꿀 같은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으니 나는 이제 다시 달려야 했다.


 때로는 이뤄지지 못한 사랑이 더 아름다운 법이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그를 마음에 품었던 것에 대한 대가라면 나는 기꺼이 우리의 이런 마지막까지 사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진심 어린 대답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에 담아둔 채로 흔들리는 버스에서 눈을 감았다. 이 축축한 베개가 다시 마를 쯤이면 그를 다시 떠올리지 않겠다는 허울뿐인 다짐을 하며.

이전 09화 33) 암탉이 울 수 조차 없는 나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