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남부에 위치한 벵갈루루는 '인도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은 말하자면 IT 혁신 도시였다. 워낙 땅도 넓고 인구도 많은 나라다 보니 지역마다 언어도 조금씩 달랐는데, 이곳에서 쓰는 칸나다어는 힌디어를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모양새가 많이 달랐다. 글자가 꼬불거리는 건 비슷했지만 힌디어는 빨랫줄에 글자들이 매달려있는 느낌이었다면 칸나다어는 이모티콘을 언어화한 느낌이었다. 날씨는 많이 덥지도 않으면서 습하지도 않아서 쾌적한 느낌이 들었다. 길거리의 젊은이들은 인도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많이 동떨어진 개방적인 스타일을 추구했다. 도처에 한식집과 중식집이 있어서 먹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도 없었다.
예상보다 활기찬 도시의 분위기에 나는 금세 의욕을 되찾았다. 마지막으로 먹은 게 3개월도 넘은 듯한 돼지고기를 팍팍 넣어 칼칼하게 끓인 김치찌개를 한 입 먹는 순간 나는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길거리의 코코넛 아저씨는 50루피(800원)에 큰 코코넛 하나를 골라 꼭지 부분을 숭덩숭덩 잘라 나에게 주었다. 코코넛 물을 다 마시고 나서 다시 아저씨에게 건네면 코코넛을 반으로 갈라주었는데, 잘라낸 코코넛 껍질 부분으로 속을 긁어먹으면 갈증 해소에 디저트까지 한 번에 해결이 가능했다. 무더기로 쌓아놓고 파는 막 입을 수 있는 200루피(3200원) 짜리 티셔츠도 내 몸에 대보면서 신중히 골라 손목에 달랑거리며 들고 가면 나름 쇼핑한 기분도 낼 수가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또 색다른 도전이 하고 싶어졌다. 개방적인 젊은이들이 많은 이 도시에서 내가 기발하게 떠오른 아이디어는 바로 '명함 나눠주기'였다. 나에게는 외국인 친구들을 만났을 때 쉽게 나를 소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던 유튜버 명함이 있었는데, 여행이 끝나가는 막바지에 이르러도 수량이 많이 남아 고민하던 중에 예전 트레이너 견습생 시절 전단지를 돌렸던 기억이 나면서 이참에 개인 홍보의 수단으로 활용해 보자는 생각이 든 거였다. 이색 도전이다 보니 여행 유튜브 콘텐츠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대부분의 인도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생각해 줄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시작한 나의 도전은 예상보다 큰 수확은 없이 심심하게 종료되었다. 길거리에 사람은 많았지만 막상 명함을 내밀면서 내 홍보를 하려니 생각보다 내가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게 가장 큰 실패의 요인이었다. 전단지는 그냥 내밀면 되는 거지만 명함은 소개를 하면서 줘야 하는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거의 나를 무시하거나 그냥 지나쳐 가기 일쑤였다. 그러면 나는 자신감이 더 떨어지고, 또 새로운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이 더 어렵게 느껴졌다. 해보기 전엔 쉬워 보였던 일도 막상 직접 해보면 세상엔 절대 쉬운 일 하나 없다는 사실을 나는 또 한 번 깨달았다.
김치찌개의 감동이 사그라들 무렵 벵갈루루에 대한 흥미도 잃게 된 나는 곧장 미련 없이 다른 곳으로 떠났다. 다음으로 내가 향한 곳은 인도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타지마할이 있던 아그라였다. 나는 공항버스를 타고 도착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델리로 간 다음 다시 기차를 타고 아그라까지 가서 툭툭을 타고 호스텔까지 이동해야 했다. 하루동안 온 교통편을 다 섭렵해서 움직였더니 호스텔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미 녹초가 된 후였다.
타지마할을 보러 갈 때 나는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인도의 전통의상인 '사리'를 입어보는 거였다. 옷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인도인들은 바느질을 한 천을 부정하다고 생각해 긴 천을 둘둘 말아서 입기 시작했던 게 사리의 기원인데, 기차나 길거리에서 보면 겉보기엔 불편해 보여도 아직도 많은 인도 여성들이 사리를 즐겨 입는 것 같았다. 이로 인한 인도의 특이점 중 하나는 뚱뚱하든 말랐든 체형을 막론하고 사리를 입을 땐 옆구리나 허리가 자연스레 노출되다 보니 우리나라와 달리 노출된 배를 보는 것에 거부감이 전혀 없다는 거였다.
나는 타지마할에 가기 전에 미리 사리를 대여할 수 있는 곳을 찾아봐야 했는데 판매하는 곳은 있어도 대여하는 곳은 찾기가 쉽지 않아 애를 많이 먹었다. 결국 나는 사고의 발상을 전환해 의상을 취급하는 곳이 아닌 헤어와 메이크업을 하는 곳 위주로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구글맵으로 검색해 보니 메이크업까지 해주는 미용실이 몇 군데 나와서 나는 그곳들을 하나씩 다 들러 가격을 물어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격을 제일 저렴하게 불렀던 곳에서 나는 추가금을 얹어 사리 대여 옵션을 억지로 만들어서 요구했다. 잠시 당황한듯한 사장님은 나의 귀여운 고집에 못 이기겠다는 듯 이내 본인이 가지고 있는 사리를 가지러 집으로 갔다. 나는 그녀가 가지고 온 여러 사리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빨간 사리를 골랐다.
다음 날, 나는 새벽 6시부터 일어나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보나마나 해가 남중할 즈음이면 날씨가 너무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릴게 분명했기에 나는 그녀에게 아침 일찍 와서 메이크업을 받겠다고 미리 언질을 주고 전날 밤 예약시간을 더블체크까지 했던 터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 도착하기 10분 전에 곧 도착한다고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오지 않았다. 불안한 예감은 왜 항상 틀리지 않는 걸까. 내가 일찍 일어난 것이 무색하게 그녀는 나의 예약시간이 30분이나 지난 뒤에 가게에 도착했다. 화를 낸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이곳은 인도였다. 귀책사유는 내 계획보다 30분을 앞당겨 말하지 않은 나에게 있었다.
헤어와 메이크업, 의상까지 다 준비를 마치고 타지마할에 입장하니 이미 시간은 9시였다. 처음 입어보는 사리는 생각보다 무겁기도 하고 조금만 조심하지 않으면 땅에 질질 끌려서 나는 다소곳한 숙녀처럼 행동해야 했는데 문제는 내가 숙녀보단 장군 쪽에 더 가까운 인물이라는 거였다. 점점 떠오는 태양과 풀어헤친 머리카락 때문에 어깻죽지에 후끈후끈한 김이 끼쳤다. 나는 갑옷 같은 이 옷과 답답한 화장을 빨리 벗어버리고 싶어서 행동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원래 나의 계획은 삼각대를 가지고 직접 사진을 찍어 남기는 거였는데 입장할 때 직원이 소지품 검사를 하더니 나에게 삼각대는 반입이 불가하니 물품보관소에 맡기라고 하는 거였다. 삼각대가 없이 혼자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에 빠져있던 찰나 입구에서부터 계속 나를 따라오던 가이드 아저씨가 이때가 기회라는 듯 나에게 본인을 어필했다. 결국 나는 그에게 아무런 가이드도 필요 없으니 300루피(5000원)에 30분 동안 내 사진만 찍어줄 수 있겠냐고 가격을 깎아 제안을 했고 그는 정말 그것만 해주면 되겠냐면서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나는 타지마할에서 남이 꾸며준 스타일에 남이 찍어준 사진으로 내돈내산 연예인 체험을 해본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타지마할까지 다 봤겠다 나는 아그라에서 다시 델리로 향했다. 그곳은 내 인도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이자 이 1년간의 여행의 마침표를 찍는 곳이었다. 원래 유라시아의 모든 나라를 훑어보고 싶었던 나는 영국을 반환점으로 하여 조금씩 천천히 갔다가 다시 조금씩 천천히 돌아오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여행이 장기간이 되자 어떤 걸 봐도 경이로운 마음이 들지 않는 여행에 대한 권태감과 나를 필요로 하는 우리 가족에게 딸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나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여행의 후반부에는 여행에 집중하지도, 내 인생에 집중하지도 못한 채 어영부영 시간만 축내버렸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욕심이 많으니 이도저도 안 된 꼴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엉망진창인 내 여행기를 내 삶처럼 사랑한다. 인생은 때로 계획처럼 되지 않고 때로 초라하고 비참하며 때로 실망과 우울만 내게 남겨주기도 한다. 여행도 그렇다. 어쩌면 여행이라는 건 인생의 축소판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삶이 내게 시련과 고난만 안겨준다 하더라도 참고 견디다 보면 또 행복하고 즐거운 날이 오는 것처럼, 참고 견디며 인내한 여행자에게 좋은 인연과 좋은 추억들을 하나씩 남겨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공항 게이트 앞에 앉아 귀국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지난 1년 간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그들의 이야기가 빠르게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집에 갈 때가 되면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라도 흐를까 봐 걱정이었는데 막상 마지막 날이 되니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덤덤히 밤비행기에 올라 창 밖을 내다보니 그날따라 유난히 까만 밤하늘에 별들이 촘촘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치 내 귀국을 환영하는 의미로 별들이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