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 혼자 떠나보는 배낭여행에 나는 반쯤은 들떠있었지만 반쯤은 걱정스러웠다. 배낭을 꾸리는 요령도 방법도 몰라서 이것저것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은 보일 때마다 죄다 배낭에 쑤셔 박기 바빴다.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건 그다음 날의 나였고, 헨젤과 그레텔처럼 가는 곳마다 물건을 조금씩 버리는 것도 그다음 날의 나였다. 나는 스스로가 달팽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집을 등에이고 지고 다니는 달팽이, 그리고 달팽이 같은 나.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내 집의 무게를 스스로 조절할 수가 있다는 정도.
내 욕심대로 배낭을 채우는 일이 결국 스스로를 더 고생시키고 힘들게 만드는 일이라는 걸 깨달은 후로 나는 점차 잘 비우고 잘 버리는 연습을 했다. 쓰이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은 과감히 비워냈고 새로 산 옷이 있으면 기존에 있던 옷을 버렸다. 여행을 하며 새롭게 배운 이 사소한 생활습관은 이 여행을 관통하는 가장 큰 깨달음이 되었다. 진정 미련 없이 비우고 버릴 수 있는 자만이 다시 채우고 가질 수 있는 자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
큰 기대와 꿈을 가지고 시작했던 내 여행은 이렇게 초라하게 막을 내린다. 귀국 후 현실에 치여 사느라 반년이나 지난 시점에 1년간 있었던 일들을 적어내야 해서 많은 고난을 예상했었는데 가끔 글이 술술 쓰일 때도 있어서 스스로에게 놀랐다. 많은 사람들은 여행 중에 가장 인상 깊게 남아있는 장면이 예쁘고 멋있고 아름다웠던 장면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방금 찍은 사진처럼 직접 본 장면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오를 때가 종종 있는데, 그것들은 주로 내가 길을 걷다가 사소한 감정이나 생각들이 들었던 순간에 본 장면들이었다. 나는 그냥 사람 사는 냄새가 묻어나는 길바닥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던 순간들, 그리고 깨달음이 있었던 순간들 때문에 여행을 하는 사람이었던 거였다.
내가 스페인 세비야에 머물렀을 때 나의 이야기를 듣던 호스트 마시모는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넌 진정 관광객(Tourist)이 아니라 여행가(Traveler) 구나."
그땐 그의 이 말이 잘 와닿지가 않았는데 나중에 다시 이 말을 곱씹어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관광객과 여행가의 차이는 아주 한 끗에 있다. 빛나는 모습, 아름다운 풍경, 자랑이 될만한 것들(光)을 보러(觀) 다니며 손님(客) 대접받는 것은 관광객(觀光客)이다. 그래서 무릇 나그네(旅)처럼 떠돌아다니는(行) 사람(家)은 여행가(旅行家) 일 것이다. 나의 여행은 앞으로 보고 뒷구르기를 하며 보아도 관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결국 이것이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빛나고 아름답고 자랑이 될만한 순간만 뽐내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그냥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진솔한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큰 기대를 하고 왔다가 날씨, 변수, 인파, 감정기복 등으로 실망만 크게 남긴 채 돌아서는 유명한 관광지 같은 사람보단, 맑은 눈과 큰 꿈을 가진 여행가들이 우연히 왔다가 평생 잊지 못하는 후미지지만 아늑한 아지트 같은 사람이고 싶다. 남을 따라 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생을 살기보단, 남이 부러워할만한 나만의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고 싶다.
나는 이제 아무도 부럽지가 않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1년 동안 여행을 하면서 많은 인생들을 지켜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누구나 고민은 있다."는 거였다. 옆집 초등학생 꼬맹이 녀석도, 뭘 해도 예쁠 나이인 중학생 사촌동생도, 노는데 정신 팔린 대학생 친구동생 녀석도, 사업이 잘 풀려 승승장구하는 친구 놈도, 돈과 인기를 다 가진 연예인도, 못 가진 게 없을 듯한 대기업의 총수도 다 각자 나름의 고충과 걱정이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관점을 바꿔 다시 생각해 보니 돈, 인기, 명예를 다 가진 사람도 나름의 고민과 걱정을 안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들에게 억울한 일이지 않나 싶었다.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힘들다고 쳐도 있는 사람이 가진 게 많아서 힘든 건 또 무슨 경우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던 거였다. 왕관을 가진 자, 그 무게를 버티라고 했던가. 없는 사람은 뭐라도 얻고 싶어서 아등바등 살지만 가진 게 많은 사람은 가진 걸 조금이라도 잃지 않으려고 역시 아등바등 살게 된다. 어차피 인생은 그런 것이다.
나는 가끔 힘든 환경에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동정을 했었다. 그런데 종종 그런 환경에 살면서도 너무나도 환한 얼굴에 행복감 가득한 미소를 띠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속이 꼬이면서 내가 가진 것과 당신이 누려보지 못했을 나의 경험들에 대해 그들에게 뻐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만약 언어의 장벽이 없다는 가정 하에 내가 정말 그들에게 그런 말들을 전하게 된다고 해도 나는 그들이 "그래서 뭐?"라고 대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것들을 자랑하고 증명해서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야만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동정받을 대상은 그들이 아닌 내가 되어야 했다.
결국 내가 잃을 것도 없는 사람인지 가진 게 많은 사람인지는 내가 생각하기에 달린 것이다. 주변사람들 기준에서 보면 스스로가 볼품없는 사람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전 세계의 기준에서 보면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만으로도 많은 것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 여행을 통해 남을 질투하던 마음과 타인의 기준에 나를 맞추려고 했던 노력들을 비워내고 버려냈다. 그 비우고 버려낸 자리엔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마음과 내 삶의 기준이 내가 되는 노력들을 차곡차곡 쌓고 있다.
이런 내가 될 수 있게끔 많은 깨우침을 주었던 1년간의 여행에서 만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나의 가족, 그리고 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있게끔 힘이 되어준 모든 독자들에게 이 자릴 빌려 감사의 말을 전한다. 이 글을 읽은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더 행복해질 수 있기를, 그리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나의 꿈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