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에게 워낙 한 달 살기의 성지로 유명한 치앙마이는 내가 기대를 많이 했던 곳 중 하나였다. 나는 워낙 즉흥적인 성격을 타고났기도 하고, 여행 계획을 세우며 이것저것 알아보다 보면 너무 기대가 커지는 탓에 도착하고 나서 실망했던 경우가 많아 사전조사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도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치앙마이에 도착했다가 살짝 놀랐던 점이 있었다. 시내 중심에 정사각형 모양의 큰 해자가 위치해 있는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앙코르와트에서나 봤었던 해자를 현대시대에 사람들이 직접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다시 마주하니 그 느낌이 참 신기하고도 멋있게 느껴졌다.
내가 처음으로 묵었던 호스텔의 호스트는 꽤나 친절했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있는 '초면인 사람이 넘으면 안 되는 선'을 왠지 모르게 슬쩍슬쩍 넘는 느낌이었다. 내가 여행 유튜브를 하는 중이라고 하자 홍보의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괜히 촬영을 의식하며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것 같이 느껴져 되려 반감이 들었다. 결국 나는 해자의 남쪽에 있던 그 호스텔에서 북쪽에 있던 다른 호스텔로 옮기기로 결정을 하고 호스트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녀는 내가 오래 머물 거라고 생각했는지 뚱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잘 가라는 인사를 했다.
새로 예약한 호스텔로 무거운 배낭을 메고 헉헉대며 걸어가는데 호스텔이 위치한 골목 한복판에 웬 키 큰 외국인이 뻘하게 서있다가 나랑 애매하게 눈이 마주쳐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거 참 해맑은 친구네.'라는 생각을 속으로 하고 있는데 별안간 그 외국인이 나를 따라 내가 예약한 호스텔로 따라 들어오는 것이었다. 내가 체크인을 하는 중에도 그는 내 옆을 서성이고 있다가 호스트가 내가 예약한 방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자 활짝 웃으며 자기와 같은 방이니 자기가 나서서 안내를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왜인지 신나 보이는 그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그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그는 짐을 푸르는 내 앞에서 한동안 쫑알거리며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 이름은 톰이고, 폴란드에서 왔고, 나이는 나보다 10살이 많고, 여러 일을 거쳐 지금은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게임 회사에서 인플루언서 마케팅 담당 업무를 하고 있고, 오토바이 타는 것을 좋아해서 동남아 여행을 자주 다니고, 지금은 얼마 전에 구입한 오토바이를 인수받기 위해서 길에서 기다리는 중에 나를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한참 자기 이야기를 떠들던 그는 갑자기 이번에 새로 구입한 오토바이를 받으러 다시 가봐야 할 것 같다면서 쪼르르 내려갔다. 호기심이 가득한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짧고 부시시한 금발의 머리. 골든 리트리버를 인간화한다면 딱 그의 모습일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오자 침대에서 쉬고 있던 그가 내일 계획이 어떻게 되냐며 내게 물었다. 나는 아직 큰 계획은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자기가 근처에 전망이 좋은 곳을 아는데 같이 가보지 않겠냐는 거였다. 나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머지않아 잠이 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는 이미 외출을 했는지 침대에 없었다. 나는 그의 연락처를 모르기도 하고 어제의 약속이 워낙 두루뭉술했어서 결국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짐을 챙겨 카페로 나왔다.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편집을 시작하려고 딱 세팅을 마쳤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톰이었다.
그는 내게 대뜸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나는 내 번호를 알려준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그는 우리가 만나기로 했던 걸 잊었냐면서 내가 방에 없어서 리셉션에 물어보고 내 연락처를 받았다고 했다. 나는 일어나 보니 너도 없고 네가 남긴 메시지도 따로 없어서 그냥 없던 일이 된 줄 알았다고 했더니 그가 어제 받은 오토바이에 작은 결함이 있어서 아침 일찍 정비를 받으러 나갔는데 그새 내가 나갈 줄은 몰랐다고 했다. 약간 삐진 나의 말투를 눈치채고 오해를 풀려고 애를 쓰는 그의 모습이 전화로도 느껴져서 웃음이 핏 새어 나왔다. 머지않아 그가 카페 앞으로 나를 태우러 왔고 나는 그가 나를 위해 사 온 새 헬멧을 쓰고 그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그때의 동행을 시작으로 우리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어느새 우리는 하루 24시간을 같은 일정으로 붙어 다니면서 하루 세끼를 같이 먹는 사이로 발전해 있었다. 그를 만나기 하루 전 날까지만 해도 나 홀로 야시장에서 사 온 초밥에 맥주를 곁들이면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같이 먹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어떤 신이 갸륵한 내 마음을 읽고 소원을 이뤄준 것처럼 하루아침에 모든 일정을 함께 하는 누군가가 생겼다는 게 참 신기했다.
톰은 항상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내게 이것저것을 물어보기도 하고 대중없이 칭찬을 내뱉기도 했다. 언젠가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너는 어쩜 눈, 코, 입 하나라도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내가 항상 콤플렉스처럼 여기는 주근깨에 대해서도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게 너의 완벽한 매력포인트이니 절대 없애려고 하지 마."라고 말하는 거였다. 나는 이태리 남자만 느끼한 말을 잘하는 줄 알았는데, 폴란드 남자도 뒤지지 않는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자연스레 그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우리는 치앙마이에서 오토바이로 다닐 수 있는 포인트들을 다 섭렵한 뒤에 배낭여행자들의 무덤이라고 일컬어지는 빠이로 향하는 일정을 세웠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짐들은 캐리어에 넣어서 그의 태국 친구의 집에 맡겨두고, 우리 둘의 배낭을 그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꽁꽁 싸매어 고정한 후에 우리는 본격적으로 빠이로 출발했다. 치앙마이에서 140km 거리인 빠이는 가는 길에 무려 762개의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차를 타고 가도 멀미를 하기 쉬운 코스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 길을 오토바이를 타고 간다는 건 (나는 도착한 후에야 알았지만) 정말 젊음의 패기로만 할 수 있는 그런 무모한 수준의 도전이었다. 약 2시간에 걸친 이동 후에 나는 오토바이의 진동으로 인한 엉덩이 통증과 배기통의 소음으로 인한 이명 때문에 전쟁통의 피난민처럼 한동안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해 있었다.
빠이에 도착한 우리는 한동안 잘 지냈는데 사소한 문제가 발단이 되어 내 마음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습관처럼 묘하게 태국을 내리깔고 자국인 폴란드를 치켜세우는 말들을 종종 했는데, 처음엔 별생각 없던 그런 언행들이 자꾸 쌓이자 슬슬 내 눈밖에 나기 시작했던 거였다. 그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나도 우리나라 자랑할 거 없어서 안 하는 게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두 번쯤은 '애국심이 넘치는 스타일이구나.' 하며 넘어갔을 텐데 계속되다 보니 점점 듣기가 거북했다. 나는 결국 그 부분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말을 들은 그는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 태국친구조차도 자기 나라 구리다고 인정을 하는데 왜 네가 기분이 나빠?"로 시작한 그의 변명은 결국 "난 여태까지 그런 말 들어본 적 한 번도 없는데 너만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까지 가고야 말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어질어질해지는 기분인 게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게 그 요즘 난리인 가스라이팅이구나 싶었다. 그는 내 입장은 이해해 보려고 잠깐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공격적인 태도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에만 열을 올렸다. 그의 태도로 말미암아 자기에 대한 열등감인지 나라에 대한 자격지심인지 그는 무언가 결핍과 피해의식이 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나는 더 이상 그를 설득시킬 자신이 없어서 입을 닫았다.
불꽃처럼 타올랐던 우리의 좋았던 순간은 그렇게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는 언쟁 끝에 너무나도 쉽게 우리의 끝을 입에 올렸고, 결국 우리는 함께 갔던 빠이에서 각자 따로따로 치앙마이로 돌아와야 했다. 남은 나의 짐을 돌려받기 위해 그에게 다시 연락을 취하자 그는 내심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나를 대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그가 나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하기 전까지 그에게 다시 살갑게 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치앙마이에서 마지막으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나와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삐걱대면서도 끝까지 자기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남은 감정들을 미련 없이 모두 털어버릴 수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짧은 시간 동안 활활 타올랐던 우리 사이도 결국 끝나고 나니 재뿐이었다. 한때 '이렇게까지 나의 모든 점을 사랑해 주고 아껴주는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해 준 사람도 콩깍지가 벗겨진 뒤엔 한낱 금사빠에 주둥이만 산 자식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결국 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고, 사랑의 속성이고, 모든 사람들의 기본 욕구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 후의 아픔을 알면서도 또 누군가를 마음에 들이고, 정성을 쏟고, 보살피고, 아낄 것이다. 설사 그게 언젠간 아픔을 준다고 할지라도, 마치 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불에 뛰어드는 게 숙명인 불나방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