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에서 루턴을 거쳐 내가 향한 곳은 모로코였다. 며칠 안 되는 시간 동안 겨울에서 다시 여름으로 돌아간 나는 달라진 계절만큼이나 달라진 모든 환경에 적응을 해야 했다. 더군다나 모로코는 내가 생에 처음으로 가 본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였는데, 사람들의 생김새가 중동사람들과 비슷해서 큰 이질감은 들지 않았다. 얘길 들어보니 상대적으로 경제상황이 나은 북아프리카는 생활 수준이나 치안이 남아프리카에 비해 좋은 편이라 유럽에서 관광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잘 웃고 긍정적인 편이었는데, 간혹가다 너무 긍정적이다 못해 능글맞은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아가디르는 모로코의 남서부에 위치한 휴양도시로 사계절 내내 온난한 기후조건 때문에 '모로코의 진주'라는 별명을 가진 곳이었다. 아가디르의 공항에 도착한 나는 호스트의 설명을 따라 공항버스를 타고 그가 사는 곳까지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가 일러준 그늘과 벤치 하나조차 없던 공항버스 정류장엔 그저 팻말만 덩그러니 꽂혀 있을 뿐이었다. 버스 정류장이 어떤 모양으로 생겼든 버스만 제대로 탈 수 있으면 나는 아무 상관이 없었을텐데 문제는 10분을 기다리고 20분을 기다려도 버스 자체를 볼 수가 없다는 거였다. 당나귀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큰 배낭을 메고 버스를 기다리는 동양인 여성을 웃기다는 듯이 쳐다봤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배가 너무 고팠던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마냥 서서 기다릴 힘이 없었다. 결국 나는 근처의 식당으로 가서 잠깐 작전타임을 가지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약 200미터 정도 거리에 작고 허름한 식당 겸 카페가 하나 있었다. 일단 배가 고파 호기롭게 입장은 했는데 메뉴판을 아무리 봐도 내가 읽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대충 사진을 보니 콩요리랑 빵 같은 걸 파는 것 같긴 한데 뭐가 뭔지 연결을 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세계만국공용어 바디랭귀지를 통해 먹을 것을 달라는 시늉을 했고, 내 몸짓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주방에 있던 남성은 나에게 계란과 토마토를 들어 보이며 괜찮냐는 눈짓을 했다. 나는 그에게 오케이 싸인을 보내고 식당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남성은 이내 나에게 계란과 토마토, 올리브가 들어간 오믈렛을 만들어 빵과 함께 가져다주었다. 맛있어 보이는 비주얼에 군침이 흘렀지만 먹기 전에 한 가지 난관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식기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곤란해진 나는 다급해진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테이블에서 일행과 차를 마시던 남자가 나와 눈이 딱 마주쳐버려서 나는 체면이고 뭐고 따질것도 없이 그에게 냅다 도움을 요청했다. 그 덕분에 나는 성공적으로 식사를 마칠 수 있었지만, 위생은 둘째치고 뜨거운 것을 잘 잡지 못하는 나는 숟가락이 없었으면 맛있는 음식을 코앞에 두고 다 식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밥을 다 먹고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심기일전을 하려는데 식당 앞에서 어떤 기사가 갑자기 나에게 따라붙었다. 영어가 조금 통했던 그는 오늘이 공휴일이라 버스가 없다고 나에게 알려주는 거였다. 나는 그가 나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서 바로 나의 호스트에게 연락을 취했다. 직접 그 기사와 통화까지 시켜주었더니 그제야 호스트가 그 기사말이 맞으니 기사를 따라가서 차를 타고 어딘가에 내려서 거기서 다시 환승을 해서 오라고 했다. 나는 별 수 없이 그의 말을 따랐다. 그 기사의 차는 미니 개인버스 같은 개념이어서 사람들이 가득 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기사가 내려주는 곳은 말하자면 중간 터미널 같은 곳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수많은 인파와 빽빽한 차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물건을 파는 잡상인들로 시끌시끌한 게 정신이 쏙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는 거라곤 드라가라는 호스트의 동네 이름밖에 몰랐던 나는 마주치는 사람마다 "드라가, 드라가"하며 옹알이하는 아이마냥 같은 말을 반복해서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내 드라가 옹알이를 들은 사람들은 나에게 어느 쪽으로 가라며 방향을 일러주었고, 그들의 손가락 방향을 따라가다 보니 드디어 드라가로 가는 차를 만날 수가 있었다.
드라가는 아가디르 중심에서도 조금 외진 곳에 위치한 서민들이 모여서 사는 마을이었다. 시내 중심에 위치하지도 않은 오트만의 집을 내가 굳이 찾아갔던 이유는 그의 레퍼런스가 매우 진정성이 있기도 했지만 그가 온 가족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튀르키예에서 혼자 사는 남성 호스트의 집에 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호되게 겪은 나는 모로코에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신중히 호스트를 골랐다. 그렇게 도착한 오트만의 집에서 나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세 명의 형제들까지 소개를 받을 수 있었다.
처음 나를 만난 오트만의 어머니 아이샤는 내가 방에 짐을 푸르는 사이 분주하게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 시간이 점심이라고 하기엔 늦고 저녁이라고 하기엔 조금 일러서 나는 그에게 이게 저녁식사냐 물었는데 그는 이게 점심도 저녁도 아니라는 거였다. 그럼 뭐냐고 묻는 나의 말에 그는 간식이라고 답했다. 디저트도 아니고 과일도 아닌데 빵과 빵에 발라먹는 재료들을 가득 내어주신 이 식사를 간식이라고 부르는 게 나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는데 며칠 동안 그들과 함께 해보니 나중엔 이해가 됐다. 이 가족들은 하루에 총 다섯 번에서 여섯 번의 식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겐 아침, 점심, 저녁의 뚜렷한 경계가 없었다. 그냥 누가 배가 고프고 누가 밥이 먹고 싶으면 그때그때 먹고 싶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먹는 것이 식사라는 개념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식사는 사람이 많기도 했고 적기도 하며 그때그때 달랐다. 나는 주로 아침에 늦잠을 자고 오후가 다 되어서 일어났기 때문에 항상 앞의 두 끼 정도는 거르고 하루를 시작했지만 아이샤가 해주는 모로코 현지음식이 너무 내 입에 잘 맞아서 나는 그 집에서 지내는 내내 배고팠던 적이 없었다. 음식이 너무 위화감 없이 잘 맞아서 내가 전생에 아프리카 사람이었는지 의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나를 게스트로 초대한 것은 오트만이었지만 나는 그보다 그의 동생인 유니스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유니스는 나를 데리고 시장구경도 가고 친구들도 소개해 주고 같이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아가디르의 이모저모도 나에게 보여주었다. 어리지만 곧은 품성을 가지고 있던 그는 특히 그의 꿈을 이야기할 때 그 아름다운 눈이 더욱더 반짝거리곤 했다. 사춘기를 막 지나고 있을 막내를 포함해 4형제가 사는 집인데도 나는 그 집에서 머무는 3일 동안 누구 한 명이라도 언성을 높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질 못했다. 그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까지도 어쩜 그렇게 온순하고 얌전한지 할퀴는 시늉 한 번 하는 모습을 못 봤다.
오트만의 가족들은 나에게 극진한 손님대접을 해주었지만 나는 그 집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콘크리트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있는 집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지만 푸세식 화장실과 물을 길어 씻어야 한다는 점이 나에게 변비와 기름진 정수리를 선사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의 집에서 머문 지 3일째 되는 날, 나는 이미 다른 호스트와 약속을 해서 지금 가야 한다는 말을 그에게 전했다. 나와 꽤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유니스는 내가 갑자기 떠나는 게 못내 많이 서운한 눈치였다. 그들이 내게 보여준 정성을 알기에 나도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가 않았다.
밤이 늦은 시각이라 나는 어쩔 수 없이 오트만의 집에서 두 번째 호스트 카릴의 집까지 택시를 불러 이동했다. 카릴이 내게 보내준 주소로 안전히 도착은 했는데 이제는 기사가 잔돈으로 장난을 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외국인이 택시비로 현금을 지불하면 잔돈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거슬러줄 돈을 갈취하는 건 아주 유명하고 질이 낮은 사기행각이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상황이 어려워서 도와달라는 말을 했으면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마음으로 기분 좋게 주었을 텐데, 푼돈으로 장난질하는 꼴에 약이 올라서 나는 그 돈을 꼭 받아내야 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카릴에게 전화를 걸어 잔돈을 바꿔달라는 부탁을 했고, 현지인이 내 배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군말 없이 나에게 다시 잔돈을 거슬러주었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이런 걸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저런 사기꾼들이 더 활개를 칠 거라면서 열을 내는 나를 보며 그는 껄껄 웃었다. 그는 널찍한 거실에서 혼자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던 것 같았는데, 이미 시간이 꽤 늦었기 때문에 우리는 간단한 안부인사정도만 주고받은 뒤 내일을 기약하며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그가 아침상을 차리고 있었다. 모로코식 빵과 각종 스프레드들, 햄, 올리브, 치즈 등등과 그가 직접 만든 오믈렛까지 순식간에 푸짐한 한 상이 완성되었다. 우리는 같이 아침을 먹으며 오늘의 일정에 대해 말을 나누었다. 대농장의 지주인 그는 그의 아랫사람들에게 모든 일을 맡겨두어서 이제 본인은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집에 그동안 다녀간 게스트만 해도 300명이 훌쩍 넘는 이유는 그가 남는 시간과 방을 이렇게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90cm가 넘는 거구에 상당한 체격을 가지고 있던 카릴의 첫인상은 솔직히 조금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그는 알면 알수록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집에 열흘 가까이 머물면서 자칫 게으르다고 느낄 법한 나의 생활패턴을 한 번도 지적한 적이 없었다. 나의 가정사와 힘들었던 과거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으면 나의 이야기를 경청해서 듣다가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해주었다. 그는 내가 영상편집을 하거나 글을 쓰느라 집중하고 있으면 직접 따뜻한 차를 타서 내 옆에 슬쩍 두고 갔다. 이혼한 전부인이 키우고 있다는 10살 남짓한 딸을 매우 그리워하던 그에게서 나는 아빠 같은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가디르엔 피가 섞이지 않은 나의 가족들이 산다. 나를 딸처럼 어여삐 여기고 먹이고 재워줬던 그들에게 먼 친척보다 더 끈끈한 무언가를 느꼈던 것은 비단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돌아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돌아오라던 그들의 약속에 나는 가진 게 없어도 항상 마음이 풍족하다. 지구 반대편 어느 나라 어느 동네에 사는 그들도 나를 이렇게 응원하고 있는데, 내가 이루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으랴. 나의 꿈은 그들과의 지난 추억에 뿌리를 박은 채 꽃 피울 그날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움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