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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경 May 09. 2022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

그동안 수고 많았어

  나는 요즘 너무 심심하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 그것에 싫증이 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쓴다. 예전에 써 둔 소설들을 퇴고하기도 하고, 새로 쓰기 시작한 것들을 이어가기도 한다. 그것도 귀찮아지면 밖으로 나가 공원을 돈다. 멋스럽게 잘 꾸며지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모습이 갖추어진 작은 공원은 소박한 자태로 나를 반겨준다. 

 만 보를 걸으려면 공원 안을 열다섯 바퀴 정도 걸어야 하는데, 그 반복되는 것이 너무 지루해서 나는 그러지 않는다. 공원 안을 한 바퀴쯤 돌다가 공원을 끼고 있는 도로를 걷기도 하고, 곁길로 난 골목길을 순례하기도 한다. 

 골목은 너무 낯설고 정돈이 제대로 안 되어서 되돌아 나가고 싶어질 정도로 거부감이 올라온다. 식당 사이에 있는 길은 어수선하기까지 하다. 잡초들이 즐비하고, 쓰레기들이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다. 그것들이 일제히 기어오를 것만 같아 몸이 움츠려 들기도 한다. 보도블록 사이사이로는 잡풀들이 고개를 내밀고, 쑥은 한 뼘도 넘게 자라 숲을 이룰 정도까지 되어있다. 얼른 그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쪼그리고 앉아 쑥을 캐고 싶다는 마음이 치솟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 지나친다. 제철 공장과 인접한 거리에 있는 곳이라 각종 매연과 건강에 나쁜 물질들을 쑥이 먹고 자랐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광양제철단지 안에서 20년 동안이나 살면서도 비염에 걸려본 적이 없었던 내가, 이곳에 오자마자 눈이 아프고 콧물이 쏟아지는 비염에 걸린 것을 보면 공기가 나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도로와 인접한 밭에서는 파를 비롯하여 양파와 고구마 그리고 각종 채소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이고 있다. 그 밭의 주인들은 공기가 나쁘다는 것을 모를까. 아니면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인가. 

 조금 걷다 보면 밭두렁과 갓길에서는 봄나들이 나온 손님들이 보인다. 샛노란 민들레들이 어여쁜 자태를 자랑하느라 바쁘고 제비꽃과 유채꽃들도 몸치장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것을 보면서 생각하곤 한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환경에 잘 적응하기 마련이고, 최악의 상황에 내던져지더라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자신에게 맞는 생존의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고. 그러면서 어느 순간 자신이 그곳에 가장 잘 어울리는 존재라 여기게 된다고. 

 오염된 공기와 쇳가루를 마시면서 살 수밖에 없는 공장지대의 식물들이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기쁘고 행복할지 모른다. 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고 말이다. 척박한 곳이지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만족하고 있다고 말이다.

 무공해 속에서 자라는 쑥과 민들레들은 사람들의 건강식품으로 호감도가 높아 뿌리째 뽑혀가기가 일쑤다. 바람이 불 때면 멀리멀리 날아가 새로운 정착지에 뿌리를 내릴 홀씨가 될 기회조차 얻을 수가 없다. 하지만 공장지대 곁의 민들레들은 사람들이 기피하여 관상용으로만 즐기고 있다. 꽃이 지고 홀씨가 되어 다른 곳에 날아가 새로운 삶을 살 때까지 잘 자랄 수가 있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자신들의 모습을 남김없이 아낌없이 사람들에게 자랑한다.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온실에서 곱게 자란 화초는 밖에 나오면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거친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없다. 작은 바람에도 휘청거리고 뿌리마저 흔들리게 된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순간순간의 고통들을 감수해야 한다.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고난과 절망의 순간들을 견뎌내야 한다. 그것을 참지 못하면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만 보가 채워지고, 내 머릿속에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차오르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것을 이끌어내어 컴퓨터 자판 위로 올린다. 온몸이 가벼워지고 생명감 넘치는 충족감에 가슴이 뛴다.

 예전에는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한다는 절박감이 앞서서 늘 허둥지둥 조바심을 내었다. 소설 첫 문장을 써 놓고 2년 동안 둘째 문장을 쓰지 못했던 적도 있다. 5분도 안 되어 시 한 편을 써 놓고, 단어 한 개가 마음에 들지 않아 꼬박 밤을 새운 적도 허다하다. 밤새 집안을 서성이며 무슨 말로 바꿀까 생각하다 보면 아침이 되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가 않다. 글이 안 되면 책을 읽고, 책을 읽다가 눈이 아프면 그림 동화책을 보고 그래도 심심하면 넷플리스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에도 싫증이 나면 낮잠을 잔다. 지극히 게으른 삶을 나는 지금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나를 위로한다. 그동안 바쁘게 살아왔으니 이제는 적당하게 게을러도 된다고 안심시킨다.

 그동안 나는 숨 가쁘게 살아왔다. 2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까지는 등을 방바닥에 붙이고 잔 적이 거의 없다. 취재하고 기사 쓰고, 아이들 과외까지 하다 보니 내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나지 않았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잠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새벽 두세 시가 되어야만 일과가 끝났던 나에게 잠이란 쓸데없는 시간 낭비였다. 한 번 잠들면 업어가도 모를 만치 깊이 잠들어버리는 내게 잠은 가장 무서운 존재이기도 했다. 

 나는 혹시라도 깊이 잠들어서 못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이불을 깔고 바닥에 편하게 누워 잘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안 잘 수가 없기에 책상이나 컴퓨터 앞에 엎드려서 잠깐 눈을 붙이는 형식을 취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 어느 때곤 잠이 쏟아지곤 했다. 길을 걸으면서도 눈을 잠깐 감았다 떴고, 10분 거리의 택시 안에서도 운전기사가 흔들어 깨울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들곤 했다. 한 번은 시어머니 생신 때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노래방을 갔는데 거기서도 잠이 들었다. 남편은 아무리 그 분위기가 싫어도 그렇지 어떻게 잠을 잘 수 있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내가 아무리 변명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의 가장 큰 소원은 잠을 실컷 자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잠을 자지 않았다. 잘 수가 없었다. 잠자는 시간이 무엇보다 아까웠다. 

 그렇게 바쁘게 지냈던 내가, 불과 5개월 전만 해도 너무 바빠서 숨 쉴 시간조차 없다고 하소연했던 내가, 지금은 할 일이 너무 없어서 심심하다고 말하고 있다. 심심해서 책을 읽고, 심심해서 글을 쓰고 심심해서 운동을 하고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감히 그런 나를 용서한다. 

 심심해서 책을 읽는 것도 용서하고, 심심해서 글을 쓰는 것도 용서하고, 심심해서 공원을 걷는 것도 용서한다.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나지 않았던,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모두 견뎌냈으니, 이제는 쉬어도 된다고 안심시킨다. 심심해서, 할 일이 없어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낮잠을 자도 다 이해한다고 토닥거린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이제는 조금 편안해도 된다고, 할 일이 없어 심심해도 된다고 꼭 안아준다. 청명한 오월이 하늘이, 나날이 푸른 물감을 길어 올리는 오월의 나무들이 잔치를 벌이는 아름다운 이 봄날을 마음껏 즐겨도 된다고 손을 잡고 이끌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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