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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21. 2022

사진/집착/저장 강박

사물의 우연 : 두 번째 서랍-데이트

옛사랑의 흔적 태우기

놀랍게도 불과 이 삼십 년 전만 해도 연인과 헤어진 뒤에는 뭔가를 태워야만 했다.

사진은 인화돼서 실물이 존재했고, 편지는 종이 위에 육필로 써져서 전달됐으며, 종이학은 커다란 통에 담겨 왔다. 목도리나 커플 옷이야 뭐 누구를 주거나 기증을 할 수 있다 쳐도 대부분의 아날로그적 커플 기념물은 연인 관계 소멸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몇십 년 전만 해도 뭔가를 태울만한 장소는 항상 있었다.


태워야만 하는 기념물 중에는 사진이 있었다. 최대한 많은 사진을 찾아내서 태워야만 했다. 사진은 인화돼서 곳곳에 숨어 들어가 있었다. 앨범엔 물론이고 책상 서랍, 가죽 다이어리, 수첩, 지갑, 책갈피, 두꺼운 영한사전이나 옥편 등에도 끼어 있었다. 최대한 찾을 수 있는 데까지 찾아 태우지 않으면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옛 연인의 흔적과 마주해야만 했다.


그건 분명 괴로운 일이었기에, 그래서 태워야만 했다. 태우지 않고서는 사진을 없앨 방법이 없었고 지금처럼 종이를 재활용 쓰레기로 버리는 시절도 아니었기에 따로 고이 모아 재활용 종이박스 안에 넣어 버릴 수도 없었다. 물론 다른 쓰레기와 함께 버릴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아날로그 시대의 연인은 그것이 예의가 아니라고 느꼈기에 태워야만 했다. 그렇게 태워야 연애의 장례식이 완료됐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시작할 때도 예상치 못하게 시작하지만 끝날 때도 그렇기에 미련이 남게 마련이다. 그 미련의 끝자락을 길게 가져가는 것 역시 사진이었다. 두께와 면적을 차지한 채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 얇은 실체를 드러내는 사진. 때로는 달랑 얼굴만 있는 증명사진으로 지갑이나 수첩에 숨어 있다가 게릴라처럼 일상을 습격하곤 했다. 때문에, 사진 찾기와 태우기는 추억의 수색이자 미련 지우기였다. 실물로 존재하는 사진을 태움으로써 추상적인 미련과 추억을 지우는 행위. 그것은 사실상 사랑에 대한 사형 선고 이후 치러지는 엄숙한 장례식이었고 추도식이었다.


사랑/연인 삭제 버튼

지금은 삭제 버트만 누르면 된다. "연인"이라는 폴더가 있다면 폴더 하나만 날리면 된다. 그런 폴더가 없다면 스마트 폰을 켜고 연인의 사진을 일일이 선택하는 수고를 하면 지우는 건 순식간이다. 설령 컴퓨터에 저장된 것이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SNS에 저장된 사진도 지우거나 극단적인 방법으론 계정을 폐쇄하거나 탈퇴하면 사라진다. 사랑-로그 아웃. "커플을 탈퇴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네"를 클릭하기만 하면 된다.


이 편리한 디지털 이별의 시대엔 사랑에 대한 추도의 시간이 없다. 정리 정돈의 시간이 로그아웃처럼, 계정 탈퇴처럼 순식간에 이뤄지기에 다시 로그인하고 새 계정을 만드는 것처럼 사랑은 다시 생성된다. 그래서 지난 사랑과 사람은 시간과 기념식 속에 잊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의 로그인, 새로운 사랑 프로그램의 덮어씀으로써 그 존재가 지워진다.


사랑을 저장하다

당연하게도, 새로운 연인과의 추억 또한 디지털로 저장된다. 추억이 경험과 시간의 길이로 쌓이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셔터 소리의 반복으로 쌓인다. 여행의 횟수로 추억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인증샷의 숫자로 추억이 쌓인다.


스마트 폰은 디지털카메라와 DSLR이 그나마 갖고 있던 성의마저 가볍게 삭제해 버렸다. 사진과 동영상은 액정 화면에 떠 있는 가상의 버튼 하나로 찍힌다. 그로 인해, 앞선 글에서 말했듯이, 찍어야 할 것과 그러지 않아도 될 것의 경계가 사라졌다. 디지털카메라는 최소한 찍혀야 할 것을 위해 꺼내 들던 사진 찍는 도구였다. "아 여기 찍어야 할 것이 있군. 그럼 카메라를 꺼내야지." 하는 인지 과정이 동반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스마트 폰은 기록장치일 뿐이다. 무엇을? 기록의 가치가 없는 것조차 기록한다. 그 결과, 눈으로 보고 감상해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맥주 한 캔을 들고 신성한 마음을 시선에 담아 타이거 우즈의 티샷을 감상한 갤러리의 특별함은 여기서 발생한다. 감상할 것과 기록해야 할 것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판단할 수 없는 시대다. 이 기록의 연쇄 속에서 의미가 사라진 시대다. 이 시대의 스마트 폰의 저장 용량은 점점 커진다.


이 시대의 커플 사진은 파일명과 날짜순으로 정밀하게 줄 서 있다. 마치 엑셀 파일의 숫자들처럼. 디지털 사진들은 자세히 뜯어볼 새 없이 옆으로, 위로, 아래로 흐른다. 커플 사진에 다른 사람이 찍혔을 리 없으니 스크롤은 당연히 낯선 사람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낯선 사물, 낯선 경치에서 멈춘다. 사람은, 커플은 그렇게 배경이 된다.


연애의 아카이브

이 엄밀하고 성실한 기록장치 덕분에 커플은 아카이브를 만들 수 있다. 그렇다. 사랑의 시간을, 연애라는 현상을 기억하지 않고 기록한다. 이 엄밀함 때문에 연인은 기록의 족쇄에 묶이게 된다. 기록의 촘촘함이 연인의 친밀함, 뜨거움, 관계의 깊이를 나타내는 척도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결국 쉴 새 없이 만나고 빈틈없이 기록해야만 한다. 일상이 공유되고, 결국 타자로써의 연인과의 거리는 그렇게 소멸된다. 그 소멸로 인해 사랑도, 연인도 더 빨리 지친다. 사랑의 왕조는 단명한다.


만나지 않더라도 서로의 일상은 기록되어 연인에게 건네 진다. 서로의 일상은 스마트 폰에 저장되어 인생의 일부분을 소유하기 시작한다. 아니 그런 환상을 갖기 시작한다. 그렇다. 이건 인생의 일부를 소유하려는 욕구다. 촘촘한 기록에 대한 강박은 연인이 된 타자를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강박과 그를 소유하려는 강박, 그를 통제하고 싶다는 욕망, 그의 일상에서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거절을 거절하는 욕망이다. 몇 년 전 BBC에서 일본의 섹스리스 보도를 한 적이 있다. 인터뷰에 등장한 젊은 일본 남성은 섹스는커녕 데이트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이유를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고백했다. 체면을 중시하는 나라이기에 젊은 청년들조차 유혹의 시도가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어찌 됐든, 이런 두려움은 소녀가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의 인기의 원천이 되고, 성적 판타지를 거래하는 시장을 확장시킨다. 결국, 스스로, 말 그대로 자위하는 청춘만 늘어난다. 그리고 그 청춘들은 합리적 변명을 발명해 낸다.


“난 내 취미가 있어. (오타쿠).”

“난 일이 너무 바빠(일본 사람들이 왜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특집 다큐멘터리가 있을 정도다.)”

“남자/여자에게 관심이 없어. (시작할 엄두를 못 내는 것이다.)”


거절 뒤에 오는 소유욕

한국은 아직 스스로를 가두는 청춘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런가? 출산율의 저하를 여전히 경제적 이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도 조만간 일본처럼 될 것이다. 사랑으로부터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의 단초는 사회로부터 거절당한 두려움, 사회로 진입하는 길 앞에 놓인 높은 장벽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청춘들은 아직 연애라는 걸 하고 있다. 그러나 두려움을 극복하고 타자의 문턱을 넘으면 타자를 소유하려고 한다. 두려움의 크기가 클수록 그것은 리스크가 되고 큰 리스크를 감수해서 얻은 것일수록 사람은 상대적으로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되고 당연히 집착하게 된다. 즉 타자를 정복의 대상, 두려움을 극복하고 얻어낸 전리품으로 보게 되면 당연히 타자의 일상, 인생은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데이트 폭력이 많아지는 것도, 스토킹이 많아지는 것도, 이별 범죄가 많아지는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일지 모른다.


기록으로서의 사진엔 연인 관계의 깊이나 에로티시즘, 타자의 섹시함은 없다. 에로티시즘과 섹시함은 세상에 내보일 수 없는 것, 기록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그/그녀의 삶과 일상이 있을 뿐이다. 타자의 삶을 통제하려는 욕구는 타자를 소유하려는 욕구이고, 소유하려는 욕구는 결국 타자를 자신의 노예로 만들려는 욕구이다. 어떤 것도 통제하기 힘든 세상을 사는 청춘들이, 그리고 연인들이 갖게 되는 강박이다.


완벽한 소유를 향한 저장 강박

이 강박이 정도를 넘어서면 누구에게도 보일 수도 없고, 보여서는 안 되는 기록, 그러나 정작 기록당하는 당사자는 알지 못하는 에로틱한 상황의 기록으로까지 이어진다. 연인의 나체를 스마트 폰으로 촬영하거나 관계의 동영상을 찍고 저장하는 것은 일종의 저장 강박이다.


그렇다. 스마트 폰 카메라는 저장 강박을 발생시킨다.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의 구분 없이 ‘버리기 아까워서, 언젠간 쓸 것 같아서, 남 주기 아까워서, 정말 중요한 것 같아서.’ 모든 일상을 찍고 기록한다. 그러나 저장 강박에 걸린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이 저장된 것의 대부분은 정상인이 보기엔 쓰레기고 저장한 본인조차 그 저장된 것들 사이에서 정말 필요하고 찾아야 할 것을 찾지 못한다.


저장 강박의 근본 원인은 가치판단 능력과 의사결정 능력의 부재에 있다. 그리고 여기 하나 더 추가하자면 저런 능력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상과 인생을 통제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싶어서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세상의 모든 물건을 갖고 있어도-물론 불가능하지만-세상을 통제할 수는 없다. 심지어 자신의 인생조차 통제할 수 없다. 그런데 하물며 연인, 사랑은 어떻겠나?


결국, 다시 말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연인과의 데이트 순간을 기록하는 것은 저장 강박에 불과하다. 평생에 걸쳐 열 장 정도의 사진을 찍었던 시대에도 가족은 유지됐고 사랑은 이뤄졌으며 생의 중요한 순간은 기록됐다.


사랑, 기록이 아닌 실행

이 통제 불가능한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이 인생의 한 시절을 통째로 기록해서 붙잡아 두려는 욕망은 이해 간다. 서른이 되기 전에 누드를 촬영해서 젊은 날의 아름다운 몸을 기록하려는 마음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기에 정말 해야 될 것은 기록이 아니라 실행이다.


카메라의 앵글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에너지를 수반한 행동, 스마트 폰 카메라를 미처 켤 새도 없이, 그 동그란 셔터를 누를 새도 없이 미친 듯이 본능적으로 움직여버리는 몸과 손, 입술에 스스로 놀라며 이성의 셔터를 아예 내려버리는 행동.


그 행동은, 백발의 중년이 된 후 돌아볼, 그래서 나에게도 빛나는 청춘이 있었음을 스스로 위로할 수 있는 찬란한 ‘호우 시절’의 추억이 될 것이다. 나이가 들면 들 수록 흐려지겠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찬란하게 기억될...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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