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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ug 18. 2022

가방

사물의 우연 : 세 번째 서랍-일상/하루

내 가방들이다. 맨 왼쪽 건, 20년 정도 됐고, 나머진 일이 년 정도 됐다. 진한 가죽 가방은 미국의 어머니가 선물해주신 것이고, 검은색 3 way Tote는 아내가 몇 해전 생일 선물로 사줬다. 


가방에 대해 말하기 위해 가방의 역사를 논할 필요까지 있을까?  가방의 역사를 논하려면 아마 구석기시대까지 가야 하지 않을까? 잉여 물건이 있으면 그것을 담아야 할 것이 있어야 했을 테니 말이다. 아버지 세대의 책보부터 논하는 것도 너무 멀다 싶어서 성큼 건너뛰어서 요즘 청춘들의 가방에 대해서만 말해보련다.      


남자의 가방에 대한 짧은 생각

남자에게도 가방은 필수품이다. 그러나 평범한 남자들에게 가방은 사치품이나 액세서리 능력은 거의 없다. 금빛 펜던트 달랑 거리는 백 팩을 멘 남자를 본 적이 있나? 아니면 그런 지갑을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내는 남자는? 그리 흔히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남자도 명품 지갑이나 가방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브랜드가 화려한 것이지 가방 그 자체가 화려하진 않다. 구찌나 샤넬의 남자 지갑이나 가방을 검색해보라. 아마 첫 화면에 무채색의 제품이 장식할 것이다. 남자의 가방은 벨트, 지갑, 자동차 열쇠와 같은 것이다(그래서 선물 세트로 팔겠지만). 그러니까 대체적으로-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필요해서 있는 것이고 그 필요에 충실한 기능만 있다면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      


물론 돈이 많아지고 지위가 좀 달라지면 그에 따라 바꾸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자들이 피부에 맞는 화장품 브랜드를 잘 안 바꾸는 것처럼 남자들은 손에 익고, 몸에 잘 맞는 브랜드의 물건을 굳이 다른 브랜드로 갈아 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물론 일본 호스트바의 호스트처럼 시계, 구두, 벨트, 선글라스, 슈트까지 섬세하게 신경 쓰는 사람도 있다. 또 우리가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서 보는 젊은 남자 주인공, 특히 실장님이나 팀장님, 대표님들은 자동차도 심심하면 바꾼다. 그러나 일상을 살아가는 남자들은 일상을 꾸려주는 일상품에 불과하다.  


여성 가방의 짧은 현대사

반면 여성에게는 그것은 일상적 도구이면서 동시에 상징적 도구이다. 말 안 해도 알겠지만. 그래서 그 유명한 3초 백의 전설이 생긴 것이고, 선지불 대기라는 명품만의 판매 정책도 생긴 것이다. 명품이라는 단어는 여행 자유화 이후에 한 유럽 명품 브랜드의 마케터가 만든 단어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명품의 역사를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1990년대 초반이다. 


그건 애초부터 명품이 아니었고 사치품에 불과했다. 그것도 남에 나라 사치품이었다. 그 사치는 여행 자유화 이전까지 아주 극소수에게 허락된 것이었고, 가까운 일본과 무역으로 오가는 사람, 또는 그쪽의 밀무역 통로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 전성시대>에 등장하는 최익현 같은 사람 말이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들어 호텔 면세점부터 유럽 명품 브랜드들이 입점하기 시작했고 그런 브랜드들이 만들어낸 백들은 90년대 야타족, 오렌지족과 함께 90년대 초중반 한국 경제 전성기를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80년대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 브랜드들은 한국의 패션 기업들을 교육시켰고 한국의 패션 브랜드들은 다양한 라이선스 패션잡지들과 손을 잡고 중저가의 준 명품 시작을 창작해 냈다. 이 모호한 단어, 명품인지 아닌지 모를 이 단어로 무장한 시장의 제품은 20대 여성들의 월급으로 감당할 만했고, 디자인은 오히려 감각적이었기에 제법 큰 시장 덩어리를 형성했다.      


필자가 이 천년 대 중반에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여학생들의 가방은 필자가 대학 때 들고 다니던 백 팩이 아니라 이런 브랜드들이 만들어낸 아주 큰 가방, 빅 백이었다. 나는 종종 기저귀 가방 같다고 놀려댔지만 여학생들은 그 가방을 오히려 텅 비움으로써 그 물건이 가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패션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웅변했다. 두꺼운 전공 책으로 그 큰 가방의 허술한 실루엣을 망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말이다. 


가방과 베스트셀러의 스펙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자의 가방은 완전 군장에 가깝다. 모든 비상 상황을 예측한 응급구조 키트다. 그 안에 든 물건을 외출해서 다 쓴다는 보장이 없다. 아니 다 쓰기 위해서 챙기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이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낙하를 앞둔 비행장에서 공수부대 대원들이 용도를 모르던 끈에 대해서 토론했던 것처럼 여자의 백 안에도 남자의 입장에서는 용도를 모르는 물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용도는 상황을 기다리고 있다. 여자 스스로도 그 용도를 미루어 짐작할 뿐인 물건도 그 상황이 되면 맥가이버의 만능 칼이 된다.     


그 가방에 든 물건이라면 하루 이틀 외박을 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아무것이 없어도 하루 이틀 외박을 해도 문제 될 게 없는 남자와 하루 이틀 외박을 해도 될 만큼 다양한 것이 들어 있는 가방을 들고 다니지만 절대 외박을 염두에 두지 않는 여자와의 만남은 그래서 아이러니다.     


역설적이게도 여자, 특히 여대생의 백안에는 전공 책이 들어갈 공간이 없다. 어느 도시의 지하철을 타 봐도 가슴에 전공 책을 든 여대생을 보는 건 어렵지 않다. 앉아 있다면 무릎에 가지런히 내려놓는다. 그러면 대뜸 이런 생각이 든다. "저 큰 가방에 들어갈 책은?" 그 가방에 들어갈 책들은 따로 있다. 바로 작은 책들이다. 쉽게 말하면 베스트셀러. 이삼십 대 여성들이 좋아하는 책은 물리적으로 유사하다. 몇 해 전 이삼십 대 여성들의 사랑을 받았던 몇 편의 베스트셀러의 물리적 스펙을 보자. 이 스펙은 온라인 서점에 명시되어 있다. 


예를 들어 <언어의 온도>는 308페이지, 가로 112mm, 세로 184mm, 두께는 3cm, 무게는 344그램이다. 그럼 다른 책, 그러니까 이삼십 대 여성들에게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책들의 스펙은 어떨까? <82년생 김지영>은 192페이지, 가로 127mm, 세로 188mm, 두께는 2cm, 무게는 294그램이다.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은 272페이지, 가로 133mm, 세로 200mm, 두께는 2cm, 무게는 346그램이고 김수현 작가의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는 288페이지, 가로, 152mm, 세로 190mm, 두께 2cm, 무게 462그램이었다. 백세희 작가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는 208페이지, 가로는 130mm, 세로는 188mm, 두께는 2cm, 무게는 294그램이고, 하태완 작가의 <너에게>는 272페이지, 가로 120mm, 세로 185mm, 두께는 21mm, 무게는 350그램이다. 이들 책의 사이즈는 공식적인 판형 사이즈 분류인 B6보다 가로 세로가 조금 작거나 크다. 페이지 수도 제 각각이다. 그러나 무게는 유사하다. 이들 스펙을 정리해보면 이삼십 대 여성들의 베스트셀러의 물리적 조건은 세로가 20cm를 넘지 않고, 가로는 13cm 언저리, 페이지는 3백 페이지 안팎, 두께는 2, 3 cm, 무게는 3백 그램 정도다.      


이 스펙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 인터넷 쇼핑 사이트의 여성 가방 베스트에 올라온 가방의 숫자는 백 개 정도다. 이 중 손에 겨우 들을 수 있는 파우치나 클러치 백을 제외하면 우리가 길에서 흔히 보는 여성들의 토트백이나 쇼퍼백이 대다수였다. 쇼퍼백이란 말 그대로 장 볼 때 들고 다닐만한 편한 가방을 말한다. 기혼 여성이나 직장 여성들은 일상적으로 편해서 들고 다니고 여대생들은 여러 잡동사니를 넣고 다닐 수 있어서 선호하는 편이다. 게다가 브랜드 로고를 크게 넣을 수 있기에 소위 명품 브랜드에서도 앞 다퉈 만들고 있고, 소비자들도 열심히 사서 이용한다.


이들 가방의 가로 사이즈, 즉 입구 사이즈가 일반적으로 30에서 40cm 사이다. 높이는 입구보다 짧거나 같다. 바닥면, 그러니 가방의 폭은 대략 10cm 안팎이다. 그러니까 여성들이 선호하는 베스트셀러들은 이 들 가방에 힘들이지 않고 넣을 수 있는 사이즈다. 책의 무게도 재미있다. 여성들이 선호하는 차 음료의 가장 작은 사이즈의 무게, 즉 용량은 340ml다. 다들 알다시피 물 1ml는 1그램이니 한 병의 차 음료는 여대생들의 베스트셀러 무게와 유사하다. 차 음료의 용량과 무게, 그리고 베스트셀러의 스펙은 양쪽 마케터들의 고민의 결과일지 모른다.       


가방, 사람, 패션, 그리고 이미지

여자의 가방은 그 안과 밖이 모두 쓸모가 있다. 밖은 브랜드, 디자인으로 그녀의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 만약 안의 내용물 또한 - 만약 쏟아져서 볼 수 있다면, 물론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 그 내용물 또한 그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물건들의 총합이다. 신분증은 없어도 된다. 화장품, 물티슈, 들어 갈만 한 작은 책, 스마트 폰과 그 케이스. 그것들의 총합이, 또는 그 개별 것들이 곧 그녀이다.      


그렇다면 스스로에 대해 말하기 힘들 때 가방을 테이블에 쏟으면 되지 않을까? 이건 마치 아주 오래전 단체 미팅을 할 때 상대방의 소품으로 짝을 맞추는 과정과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땐, 그 소품을 보고 그 사람의 이미지를 아주 힘겹게 떠올려야 했다. 그것은 일종의 추리이자 어설픈 점쟁이의 넘겨짚기였다. 


가방을 쏟아내면 그럴 필요가 없다. 그녀의 이미지는 가방의 겉과 안, 그 내용물과 일치한다. 아니, 일치되도록 아주 노력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그녀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 밖에 있던 것들 중에서 고른 것이다. 세상에 이미 그녀의 이미지의 샘플이 존재한다. 뷰티 프로그램들은 친절하게 옷을 입는 법부터 화장법까지 가르쳐 준다. 연예인들은 다른 이미지의 전형들이 되어서 대중에게 전시된다. 대중적 이미지라는 말은 그래서 연예인인 한 인간의 본연의 이미지가 아니라 연예인 그 자체가 대중을 위해 설정하고 생산해낸 이미지다.      


결국 여대생들이 들고 다니는 전공 책은 그녀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녀를 알기 위해서는, 그렇다 가방을 쏟아봐야 한다. 그녀가 카페에서 공부할 때 말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들고 읽을 때 봐야 한다. 그녀가 300그램짜리 책을 꺼내 들 때 그녀는 그 책을 통해 자신이 해석되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텀블러, 패션, 헤어스타일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책은 읽히기 전에 이미 소비된다. 특히 시각적으로, 상징적으로 소비된다. 그녀의 상징적 이미지에 걸맞은 패션 브랜드의 잘 재단된 의상처럼 많은 베스트셀러들이 종이를 깎아내어 몸매를 교정한다. 마치 걸 그룹들이 일제히 다이어트를 해서 균일한 몸매와 다리 길이를 맞춰내는 것처럼, 그 몸으로 비슷한 옷, 심지어 같은 옷을 입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베스트셀러, 특히 여대생의 베스트셀러가 꼭 책의 내용 자체가 좋아서 베스트셀러가 됐을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없다. 내용 이전에 시장이 원하는 규격이 있고, 이미지가 있고, 패션이 있기 때문이다.     


가방이 세상에 나올 때 빈 채 나오듯, 우리 또한 그러하다. 부모가 물려준 몇 가지 필연적인 재주와 재능, 타고난 몇 가지 성향을 제외하면-물론 그것들이 아주 중요하긴 하지만-우린 비어 있다. 비어 있기에, 어느 광고 카피처럼, 우린 스스로를 완성할 수 있다. 선택의 여지는 있고 공백은 가능성의 충만함을 웅변한다. 그러나 이미 그 공백을 채운 이들-대체로 부모와 선생님-이 그 공백을 채울 뭔가를 제시한다. 앞다퉈 꾹꾹 눌러 채워준다. 거절할 틈도, 항의할 틈도, 공백 위에 뚜껑을 덮을 새도 없이 부어, 쓸어 넣는다. 내가 그 공백을 채울 뭔가를 선택하려 할 땐, 이미 우린 뭔가로 많이 채워진 뒤인 이유다. 그래서 우리가 상품과 이미지, 패션의 세계, 채울 수 없는 뭔가를 찾는 대신, 무엇으로 채워졌는지 세상이 눈치챌 수 있는 깃발과 표상을 찾아 백화점을 헤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직 늦지 않았다. 모든 가방은 비울 수 있듯, 우리에게 채워진 것 또한 비울 수 있다. 남에 눈치 보지 않고, 브랜드 신경 안 쓰고 내가 채우고 싶은 것으로 채울 수 있다. 그걸 굳이 꺼내보여 줄 필요도 없다. 인생엔 속에 있는 걸 꺼내 보일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 사람들은 알게 된다. 그러니 미리 꺼내어 늘어놓고 자랑할 필요 없다. 채워진 것은 비울 수 있고, 비워진 것은 채울 수 있으며, 채워진 것은 그 채운 것과 채운 사람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세상에 호명당할 것이다. 서서히, 천천히, 묵묵히, 두리번거리지 말고 비움과 채움을 반복하길. 그 반복 속에 남아야 할 것은 남고, 나가야 할 것은 결국 나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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