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훈 Sep 01. 2022

사진/SNS&젠트리피케이션

사물의 우연 : 세 번째 서랍 - 일상/하루

사진의 기능     

이제 더 이상, 사진은 찍히지 않는다.

단지 기록할 뿐이다. 무엇을? 모든 것을. 모두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디지털카메라가 모두의 손에 들렸던 2천 년대 초반까지, 그래도 사진은 찍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마트 폰이 모두의 손에 들려진 2천10년대 이후, 사진은 찍히는 것에서 기록되는 것으로 전환됐다. 그 기록은 그것의 기록될만한 가치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록 가능하기에 행해진다. 그 결과, 모든 자리에 스마트 폰이 있고, 벨이 울리지 않아도 주인은 틈틈이 집어 든다. 스마트 폰은 이제 2G 폰 시대의 아저씨가 그랬던 것처럼 허리에 차거나, 주머니에 집어넣거나 가방에 넣은 채로 은폐될 수 없다.  

   

전시물인 스마트 폰

스마트 폰은 그 자체로 전시물이다. 마치 자동차의 페이스 리프트나 연식 변경처럼 매년 다른 모습의 신제품이 출시되기 때문이다. 물론 제조사와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카메라의 화소와 저장용량,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 보안 기능 등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신제품이라고 광고하고 그 광고에 동의하고 구매하지만, 결국 스마트 폰은 스마트 폰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바꿈으로 인해 스마트 폰 주인은-두 암살자의 대화에선 늘 두 손이 보이도록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어야 하는 것처럼-전시됨을 강요받는다. 그 물건 자체를 자랑하기 위해도,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카메라 슈팅의 순간을 위해서도 스마트 폰은 눈앞에 있어야만 한다.   

  

슈팅의 순간은 모든 순간이다. 어느 순간이 기록될지 스스로도 모른다. 결정할 필요도 없다. 코스 요리를 먹는 사람이라면 메인 요리가 나온 다음에 단 한번 찍을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전채부터 후식까지 다 찍을 수도 있다. 음식에 무심한 사람이라면 테이블에 앉아서 셀카를 찍은 후 식사에 몰입할 수도 있다. 즉 찍히는 사물과 상황의 중요성은 개인에게 달려 있다.


중요한 장면의 실종

결국, 이 시대엔 상황과 장면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없다. 카메라가 귀하고 필름의 장수가 정해져 있던 시대엔 꼭 찍어야 할 순간과 중요한 상황에 대한 공감대가 분명했다. 결혼식에서 하객 사진과 신랑 신부 사진, 직계 가족사진 등 중요한 사진은 전문 사진작가에게 맡기는 것처럼 말이다. 이 시대엔 이 중요성의 기준이 부재하기에, 역설적으로 개인 스스로도 뭘 찍어야 할지 모른다. 선택이 불안하다. 상황, 사물, 그리고 주체의 찰나. 그 모든 것 중에서 무엇을 찍어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으니 찍으면서도 불안하다.


사진의 공개와 안 찍을 용기

찍힌 것은 공개된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공개되어 나와 다른 중요성을 가진 사람에게 그 찍힘에 대해 설명하고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사진은 유행에 따르게 된다. 무엇을 입을지 모르는 사람에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 유행을 따르는 것이듯 스마트 폰으로 찍히는 모든 것은 유행의 맥락에 있다. 장소도, 거리도, 사람의 모습도, 음식도, 골목도, 벽화도, 심지어 공부와 섹스도.     


역설적으로 무엇을 안 찍기 위해선 종군기자와 같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들은 전쟁을 기록하기 위해 전장을 뛰어다녔다. 반면 모든 것을 기록하는 전장을 살아가는 우리는 찍지 않기 위해 무기를 휴대하지 않는 위생병(헥소 릿지의 주인공)과 같은 용기를 발휘해야만 한다. 그것-스마트 폰을 들어 사진을 찍지 않는 것-은 어떤 것에도 의미 두지 않음을 공표하는 것이며, 만약 의미 있는 것이라면 육필로 기록을 남기거나 머리로 기억한 뒤 나중에 추억하겠다는 반 디지털적 반란과 반동, 저항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이 용기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는 것 이상의 용기다. 그러나 이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용기가 갑자기 사라질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연애를 시작하거나 아이를 키우다 보면 이런 용기는 사라진다. 아빠들은 SNS를 하지 않고, 촬영된 것을 몇 주 후면 다시 보지 않더라도 아이의 발표회를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한다. 기록이 부재하면 아이와의 추억도 부재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낀다.


기억을 묻는 이유를 모른다.

<초록 물고기>에서 막동이가 형에게 전화를 해 계속 기억나냐고 묻는 장면은 이 세대에겐 이해받지 못한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오열하며 물어서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순간을 기록할 수 있고, 기록하는 것이 당연하기에, 기억의 유무를 반복해 묻는 것이 의미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록물고기>는 아날로그적인 영화이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억에 관한 영화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심혜진이 오열하는 이유가 사진 때문이 아니라 사진에 대한 기억을 현실에서 마주했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이젠, 서로의 기억이 엇갈려 싸우거나 예전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기 위해 "그" 장소에 다시 갈 필요가 없다. 모든 관광지, 특히 국내 관광지는 사진 찍기 좋은 장소여야만 하고 그 벽화 마을에서의 사진 찍음은 그 장소를 다시 갈 이유를 없앤다. 벽화의 기억은 손안에 담겨 있다. 벽화를 사진 스폿으로 파는 관광지가 결국, 언젠간 그 수명이 다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젠간 그곳에서 모두 사진을 찍기 때문이다.


관광, 아카이브, 스탬프

결국, 그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계속 그림을 바꿔야만 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그런 스폿을 만들기 위해 허름한 골목이 많은 마을을 찾아 벽화를 그리면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시 재생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낡은 도심 어딘 가에선 그런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기록의 누적은 역사를 만들지 않고 아카이브를 만든다. 역사는 해석되는 것이지만 아카이브는 확인하는 것이다. 그때 그 사건을 내가 행했음을 말이다. 아카이브엔, 그 행함의 의미를 찾는 해석이 부재하다. 사진 속에 나는 즐거워 보이고, 나와 동행한 사람도 당연히 그렇게 보인다. 그거면 됐다. 그 결과, 모든 사진은 결국 인증 샷으로 전락한다. 거기서 그것을 행했음을 인정받기 위한 스탬프. 관광 도장 찍듯이 우린 사진을 찍는 것이다. 이 스탬프가 만연한 일본이 예상치 못한 스폿마다 다양한 모양의 스탬프를 만들어 놓듯이 우리도 곳곳에 이것을 만들어 놨다. 심지어 아주 평범한 지하철역에도 말이다.     


이 평범성의 기록, 기록의 평범성이 우리를 방랑자에서 여행자로, 여행자에서 관광객으로, 관광객에서 다시 기록자로 순차적으로 전락시킨다. 단체 관광 스폿에서 사진을 찍던 무리들은 이젠 아예 흩어져서 자기만의 기록을 남기느라 분주하다. 스폿의 의미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지 못하고 사진과 스탬프로‘만’ 만들어진다. 그래서 의미 있는 스탬프와 의미 없는 스탬프 간의 가치 차이는 사라진다. 영리한 지방자치단체라면 이 스탬프의 힘을 잘 이용할 것이다. 아무리 평범한 장소라도 보물을 숨기면 보물섬이다. 스탬프가 있는 곳이 관광 루트다. 그 스탬프를 숨겨 놓은 지도를 관광객에게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 보물지도처럼.    

 

"당신은 여기서 사진과 도장을 찍으세요. 그럼 당신의 00 관광 미션은 완성!!"     


지자체마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거의 모든 도시는 말이다. 그나마 스탬프는 아날로그적인 보물 찾기이자 미션 수행이다. 자기만족적이고. 그러나 스마트 폰 사진은 네트워크 연동을 통해 타자 지향적이 돼 버린다. 내가 찍은 사진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으로 쉽게 올리어지고 찍힌 사진마다 사진을 어디로 올릴 건지 묻는다.      


타자가 부여하는 의미

그 사진들은 내 앨범에 꽂히지 않고 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올려 짐으로써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된다. 거기에 올려진 이상 그 사진은 내 것이 아니다.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앨범을 보여주기 싫으면 안 보여주면 그만이던 시대가 끝난 것이다. 이젠 보여주기 싫으면 비공개로 하거나 계정을 닫아야만 한다. 보여주기로 한 이상 “좋아요”를 받아야만 한다. 이 스마트 폰 시대의 사진은 찍음으로써 의미를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보임으로써 의미를 획득한다.      


의미? 무슨 의미? 거기엔 사진 본연의 의미는 없다.

단지 노출과 엿보기, 그리고 과시와 부러움, 결핍과 욕망이 있을 뿐이다. 사진은 그 안에 담긴 주체와 사물, 상황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지 않고 그 사진에 딸린 텍스트-해쉬 태그와 짧은 글-와 타자의 반응으로 의미를 생성하고 전달하고 재생산된다.


사진은 그렇게 잠시 떠들었다가 사라진다. 어제의 사진은 오늘, 아무 의미도 없으며, 업데이트의 반복 속에 너무 빨리 잊혀진다. 인스타그램의 바둑판식 나열은 그래서 잊히어지는 것을 막고 싶은 사용자와 앱 개발자의 궁여지책이다. 하나의 스크롤, 하나의 모니터 화면 안에 최대한 많은 사진이 노출되는 것. 그래서 최대한 과거를 지연시키고 오늘에 묶어 두는 것. 그것이 이들의 전략이다.     


사진은 스스로 말하지 않고 해쉬태그를 통해 말하고 그걸 보는 사람은 “좋아요”와 댓글, 반응을 달면서 사진의 주인과 대화한다. 사진을 올린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계속 사진과 해쉬태그로 메시지를 보내고, 불특정 타자는 줄줄이 다시 댓글을 단다. 그 문장 들 중에는 종종 "우리 소통해요."와 같은 말들이 달린다. 바우만의 말처럼 서로 말하는 방식이 다르고, 해석도 하지 않는 소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서로 모르고 있다. 둘 다 일방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올리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그것은 포르노적 전략이다. 행위의 의미 없는 행위. 그것의 반복. 그리고 과잉. 반복. 다시 과잉. 증폭되고 낭비되고 반응하고. 다시 더 큰 과잉.     


00길/거리의 탄생과 젠트리피케이션

이 과잉을 통해 최근 십여 년 간 젊은 소비자들, SNS와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청춘들이 수많은 거리들을 만들어냈다. 주말 섹션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늘 전전긍긍했던 일간지들은 주말마다 맛집을 소개하고, 걷기 좋은 거리, 사진 찍기 좋은 카페와 식당, 포토 스폿을 소개했다. 그래서 매화로 유명한 경남 원동의 작은 역 앞의 벽조차 커다란 날개가 그려진 포토 스폿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앞의 작은 마을 골목엔 정체불명의 만화 캐릭터와 이미지들이 나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찍을 만한 것이 없으면 유명해질 수 없고,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찍혀야 했다. 그런 곳, 즉 누군가에 의해 먼저 찍힌 곳들은 무명의 장소-엄밀히 말하면 그 이름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던-곳에서 금세 유명한 곳이 되어 버렸고 그곳은 찍는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이름들이 붙여졌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러 몰리고 그곳에서 차를 마시고 맥주를 마시고 음식을 먹지만 그곳의 이미지가 다 소비되면 그곳은 다시 한산해진다.      


그 한산함을 막기 위해 그곳의 가게들은 끊임없이 순환될 수밖에 없는데 그 숙명과 함께 실체 없는 유명세가 상가 수익으로 직결된다고 착각하는 건물주 때문에 임대료는 상승돼서 이 순환을 더 빠르게 한다. 그 빠름은 임대료의 무게로 서서히 느려지고 결국 그 순환 자체를 소멸시킨다. 건물 그 자체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건물주는 모른다. 의미는 그 건물 안에서 사진을 찍는 소비자로 인해 발생하고 그로 인해 가치가 발생한다.


역설적이지만 그곳에서 사진을 찍는 청춘들의 주머니는 가볍기에 어떤 제품이든 어느 가격 이상으로 올려서는 안 되는데 임대료가 상승하면 제품 가격에 당연히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장사의 본질, 미디어와 SNS, 청춘들의 스마트 폰이 만들어낸 거리의 가치의 본질을 꿰고 있는 젊은 사장들은 가격을 더 이상 올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 유명했던 거리를 떠나 아무도 찾지 않는 거리로 떠나간다.


이것의 반복이 세계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행해진다. 특이하게도 일본만 상가 보호법을 통해 이것을 방지하고 있고, 일본 건물주들의 독특한 철학, 즉 유명한 맛집이 오랫동안 한자리를 차지하고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건물의 가치, 그 자체라는 철학이 이런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막아내고 있고, 더 나아가 소위 와/화(和)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자기 주제와 분수를 지키며 살라는 사회적 압박 때문에 한 자리를 지키며 사는 것도 이 현상을 막아내는 하나의 저지선 역할을 한다.     


잠재된 폐허의 불안

그러나 사진이라는, 그것을 통한 광범위한 불특정 다수의 소통으로 만들어낸 잠깐의 붐업과 이를 통한 장사의 호황, 그리고 그 호황이 권리금과 임대료 상승으로 이어져야만 한다는 우리나라 건물주와 업주의 사고방식은 모두의 SNS에 기록된 사진의 무대를 순식간에 폐허로 전락시킨다. 마치 더 이상 관광 명소로 기능을 상실한 유명한 드라마의 세트장처럼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내면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사진의 기록이 쌓일수록, 그 사진으로 타자와 소통한다고 착각하며 살면 살수록 우리 내면은 빈 상가처럼,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난 거리처럼 폐허가 돼가는지 모른다. 그 폐허화를 저지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내 외벽에 새로운 벽화를 그린다. 새로운 사진을 찍고 멋진 문구를 쓰고 반응을 기다린다. 낯선 타자들이 줄지어 방문하고 사진을 찍고 “좋아요”를 누른 후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다시 폐허의 바람이 불면, 조바심이 난다. 그럼 다시... 다시... 다시...

이전 22화 이어폰/헤드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